빌린 얼굴 / 정 영
2015-11-03 (화) 12:00:00

주선희 ‘정원에서’
빈사의 꽃이
제 태어난 자리가 제 무덤이 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진다
그런 날은 아름답지
망각의 사랑을 나누는 개들처럼
한 때 나는 거창한 사랑을 꿈꾸었다
까맣게 그을렀던 팔과 다리는 이제
철지난 해변의 적막 같아
어떤 슬픔도 없이
낮은 잠시
긴 밤은 어둠을 풀어서 이불을 짓는데
밖을 내어다보면
광장엔 몇몇의 앳된 연인들
싸구려 폭죽처럼 밤 속으로 사라진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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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나 아닌 나와 마주하며 갈등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한 나이고 무엇이 빌린 나인가. 그것은 단지 현실과 꿈의 차이일 뿐, 결국 하나가 아닐까. 거창한 삶을 꿈꾸던 이는 철지난 해변의 적막처럼 슬픔도 없이 잦아드는 현실을 바라본다. 싸구려 폭죽처럼 스쳐간 사랑, 삶, 모두 헛된 것일까. 그러나 보라. 빌린 얼굴 위에 드러나는 구겨진 생의 진실들, 아름답지 않은가, 툭툭 지는 꽃처럼.
임혜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