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피다
2025-12-23 (화) 12:00:00
권지숙
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
한 아이가 태어나고 한 남자가 임종을 맞고
한 여자가 결혼식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너는 오지 않고
꽃은 피지 않고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 나는 다시 기다리기 시작하고
시간은 힐끗거리며 지나가고
손가락 사이로 새는 모래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소란스런 시간
찻잔 든 손들은 바삐 오르내리며 의뭉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생애가 저무는 더딘 오후에
탁자 위 소국 한 송이
혼자서 핀다
‘오후에 피다’ -권지숙
탁자 위 소국은 더 막막했을 것이다. 두꺼운 이중 창호 때문에 가을 나비와 꿀벌들 닝닝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창문을 열어두었더라도 도깨비도 세다가 날이 새서 돌아간다는 방충망 네모난 눈들이 막아섰을 것이다. 소국이 담겨 있는 화병 속에는 발목조차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연거푸 모래시계를 뒤집어놓는 동안 혼자서 피기로 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피웠지만 그 향기는 온 우주로 퍼졌을 것이다.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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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