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2015-11-0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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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논설위원)

11월이다. 며칠 있으면 겨울로 들어선다는 ‘입동(8일)’이 다가온다. 오래지 않아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23일)’에 닿을 것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길목이다. 제 자리의 끝을 향해 세월은 스르르 흘러가는 중이다.

11월은 달력이 두 장 남은 시점이다. 넘겨야 할 달력이 한 장 남았기에 마음이 놓인다. 한 장만 더 넘기면 한 해가 지나간다는 아쉬움도 교차한다. 언뜻 스치는 ‘벌써, 어느덧, 이제, 겨우, 아직도…’라는 수식어는 그런 마음을 그림자처럼 비춘다.


11월은 가을부터 초겨울 낙엽 져 밑 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계절이다. 솔직하고 겸허를 지닌 달이라 보기도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아쉬움이 더욱 가득한 달. 어느 새 끄트머리에 다다른 보내기가 너무 아쉬운 달. 돌아가기엔 너무 와 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이 공존하는 달. 감성이 풍부한 시인들은 그렇게 11월의 시나 노래를 읊었다.

11월엔 절정을 뽐내던 단풍도 서서히 진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는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산에 올라보면 나목들이 즐비한 계절에는 산의 속살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름철 녹음이 짙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계곡 속의 작은 돌멩이도 한 눈에 뚜렷하게 들어온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을 앞두고 세월이 지나가듯 계곡물도 쉼 없이 흘러감을 엿볼 수 있는 때이다.

11월이 되니 날씨가 더 쌀쌀하다. 아침저녁으로 을씨년스럽다. 썰렁하기까지 하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유도 없이 우울함이나 비애, 슬픔, 침울함 등의 감정이 솟아난다고 한다. 작은 아쉬움에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말이다. 우울을 뜻하는 ‘멜랑꼴리’의 표현이 유독 잦아지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11월은 사람들을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달이다. 우리의 삶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지만 이미 많은 시간도 보냈다. 그래서 선각자들의 ‘내려놓기’와 ‘새로운 시작’이란 절절한 삶의 철학들을 ‘일상 속 스승’으로 만나봐야 할 때다. 그러면서 자신을 진솔하게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지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 말이다.

11월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우리는 대부분 한 해를 보내면서 연초의 다짐과 달라진 삶에 아쉬움을 갖게 된다. 미련과 후회가 뒤따르기도 한다. 프로스트는 자신의 선택이 비록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너무 따지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고 애써 자책도 하지 말고 주어진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차피 세월을 흘러가는데 어제를 후회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결국 ‘지금’이란 현재는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란 의미가 아닐까 싶다.

11월은 인디언으로 불리는 북미원주민(Native American)이 떠오르는 달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11월은 좀 독특하다. 부족마다 11월을 부르는 명칭이 다 다르다. 그 운치는 넘쳐날 정도다. 자연과 벗하면 살았던 그들이 숫자대신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담아 매월의 이름을 정했기 때문이다.

북미원주민 11월 달력을 보면 크리크족은 ‘물빛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체로키족은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테와 푸에블로족은 ‘만물을 거둬들이는 달’이라고 했다. 위네바고족은 ‘작은 곰의 달’, 키오와족은 ‘기러기 날아가는 달’, 하다차족은 ‘강물이 어는 달’이라고도 불렀다. 주니족은 ‘이름 없는 달’. 위쉬람족은 ‘아침에 눈 쌓인 산을 바라보는 달’, 모호크족은 ‘많이 가난해 지는 달’, 아라파호족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11월이다. 한해의 마지막 앞 달이며 연말로 가는 길목이다. 여전히 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달이다. 그래서일까?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란 명칭이 마음 속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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