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름에 생명 걸고 멋있는 삶을!

2015-10-3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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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 사람이라면 이름이 없는 사람이 없다. 성명(name)이라고 불리는 이름은 한 사람을 대변해 주는 가장 짧고도 강한 대변자의 역할을 한다. 미국에 들어와 이민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겐 영어 이름이 필요해 본의 아니게 긴 이름을 갖고 살아도 간다.

자신이 가진 이름은 자신의 인격을 대신한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이름만 대도 신용이 될 수 있다. 반면, 어느 이름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게 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이완용’하면 떠오르는 게 ‘매국노’다.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장본인 중의 장본인이니 그렇다. 그런가 하면 ‘안중근’하면 애국 열사를 떠 올리게 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친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며 첫 마디가 “축하 한다”고 말한다. 영문도 모르고 무얼 축하 하냐고 물었더니 단체장에 이름이 나와 있어 축하를 한단다. 한국에서도 미국소식을 듣나보다. 문인들이 모이는 협회 외에는 아무 단체도 참여하지 않고 있는 터라 다시 자세히 물었더니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다.

이름에 토씨 하나만 틀리지 너무나 똑같아 이런 일은 번거롭게 일어난다. 며칠 전에도 또 그런 일이 있었다. 모 단체가 기금모금 골프대회를 하는데 내 이름이 무슨 부위원장에 나왔다고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면서 자기네도 골프대회를 하니 협력해 달라는 거다. 다시 동명이인임을 설명하고 오해가 될 소지를 없앤 적이 있다.
진도희(본명 김태야)는 1970년대 스타다. 그런데 한지일이 제작하여 히트 친 성인영화 ‘젖소부인’ 시리즈의 여주인공도 진도희(본명 김은경)였다. 진도희가 있음에도 어린 여배우에게 진도희란 예명을 지어준 한지일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김태야는 미국에 있는 한지일에게 전화를 걸어 후배 진도희 이름을 바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지일은 김은경을 만나 사정을 얘기했으나 그녀는 거절했고 한지일은 그대로 진도희를 써 찍어낸 영화들은 히트 쳤다. 한지일은 지난 6월 김태야씨가 죽은 후 공황장애와 고혈압으로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고 한다. 이름에 먹칠을 당한 김태야씨는 1980년대 초 뉴욕에 살면서 시를 쓰곤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지낸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장자, 노자, 에디슨, 이름만 들어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된다. 또 그들이 역사에 남긴 업적들을 기억하게 된다. 사람의 이름은 이토록 오래간다. 자기 고유의 이름이 없는 짐승들은 가죽만 남기지만 사람은 천년 이천년이 지나도록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이름값을 해야 한다.

가끔 동네와 가까운 가톨릭 공동묘원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본다. 육신은 썩어 땅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고 이름은 묘지의 비석에 새겨져 가족들이나 묘지를 찾는 오고 가는 객들에 눈에 비친다.

“Erected by David Donovan in memory of his beloved wife Elenora R. Donovan Nee Lamey died Oct. 24. 1922.”

데이빗 도노반이 그의 사랑스런 아내 엘노라 알. 도노반 니 래미(1922년 10월24일 사망)를 위해 세운 비석이란 뜻이다. 아내의 이름이 길다. 하지만 사랑스런 아내가 떠난 후 남편이 아내를 기억하기 위해 새겨 준 이름이다. 그리고 David Donovan died Sept, 7. 1936. Aged 63 years. 같은 비석에 남편도 있다. 자식들이 넣었나보다.

가문에서 만든 대동보엔 무수한 종친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름과 함께 새겨진 족보엔 그들의 업적도 있다. 종친들은 선조의 이런 업적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람은 가고 없지만 이름이 남아 후손에게 대대손손 전해지는 거다. 이름엔 혼이 담긴다. 이름엔 가문이 담긴다. 이름에 생명을 걸고 멋있는 삶을 살아봄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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