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흙수저와 정신건강

2015-10-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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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지난 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한정애 의원은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다고 밝혔다. 현행 채용절차법은 응시원서, 이력서, 자기소개서에 구직자 초기심사 자료 표준양식을 정해 구인자에게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력서 등에 구직자의 사진을 부착하고 키, 체중 등 신체조건은 물론 구인자의 부모 직업, 재산, 출신지역 등을 기재토록 해 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


한정애 의원은 “입사전형의 첫 단계인 서류 전형에서 부모의 직업, 재산 등을 기재토록 하면 이른바 ‘흙수저’ 논란은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며 능력 중심의 공정한 채용문화 정착을 주장했다.

이 ‘흙수저’가 무엇인가 했더니 한국의 2030 젊은이들이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분류한 것이라고 한다. 흙수저는 잘못하면 와르르 부서져서 밥조차 먹을 수가 없으니 이 단어 하나에 젊은이들의 허무와 절망을 단번에 읽을 수 있다.

원래 부유층 출신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했다. 과거 유럽 귀족계급이 은식기와 은수저를 사용한 풍습을 빗댄 것이다. 요즘은 은수저보다 비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로 문장이 바뀌었다.

얼마 전 배우 조재현의 딸 조혜정의 MBC에브리원 ‘상상고양이’ 여주인공 출연 소식에 온라인이 들끓었다. 단역을 하던 조혜정이 조재현과 함께 SBS-TV예능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하더니 단번에 유승호를 상대역으로 한 주역이 된 것이다.

금수저 덕분이라는 네티즌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저 조용히, 맡은 역을 열심히 잘하여 “조혜정 연기 최고야” 하는 말을 들으면 입에 문 금수저는 저절로 떨어져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흙수저라는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시대, 인간관계와 내집 포기를 더해 오포시대, 취업과 희망을 더 포기해 칠포시대를 산다고 한다. 성공에 대한 압박감에 명문대와 대기업에 기를 쓰고 가려하나 쉽지않아 한창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있어야 할 젊은이들은 자신이 사는 곳을 ‘헬 조선’이라 한다.

‘헬(Hell, 지옥)’과 한국을 가리키는 ‘조선’의 합성어다. 그리고 요즘 개천에선 용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용들은 개천을 버렸다’고도 한다. 과거에는 없는 집 자제들이 판검사, 공무원 혹은 성공한 기업인이 되면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했다. 입신양명한 그 용들이 요즘은 사회정의보다 기득권과 한통속이 되어 스스로 개천을 버렸다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헬 조선이나 흙수저란 표현은 모든 것을 사회 탓, 나라 탓, 부모 탓으로 돌린다. 왜 내탓이라는 생각은 안하는지? 1990년 전후로 한국에 널리 퍼졌던 천주교 평신도협의회가 주동한 ‘내탓이오’ 운동이 다시 부활해야 될 것같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신조어를 만들어내어 사용하면 스스로 상처만 더 받을 것이다. 미국에 오래 살수록 한국에서 사용하는 이런 낯선 말들이 많아지고 설명 해주어야 이해를 하게 된다. 있는 집 자식이든, 없는 집 자식이든 태어나기 전에 부모를 정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먼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도 바꾸어야 한다. 젊은이들의 의식이 건강해야 사회도, 나라도 건강해진다.

이번에 제62대 하원의장에 선출된 공화당의 폴 데이비스 라이언(45) 하원의원도 한국식 표현대로라면 흙수저 출신이다. 16세에 아버지가 죽고 사회보장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맥도널드 매장 점원, 웨이터와 피트니스 트레이너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릍 통해 학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뉴욕한인사회에는 흙수저로 이민의 꿈을 일군 1세들이 많다. 부모가 쥐어주는 금수저를 마다하고 스스로 흙수저부터 시작하는 이민 2세들도 있다. 이런 사회가, 나라가 건강하다.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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