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슈바이처를 다시 생각한다

2015-10-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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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주필>

가을이 되니 도심 외곽에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일 년 내내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논밭을 가꾼 농부들의 줄기찬 노력과 수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연중 최고의 선물이요, 가장 큰 결실이다.

때맞춰 지구촌에도 인류사회 복지 및 건강증진과 빈곤퇴치, 아울러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 인간사회 최고의 결실이 줄을 이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 화학, 물리학, 생리학, 의학, 문학, 경제 분야에서 탁월한 결과를 가져온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꽃이 되는 부문은 평화상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올해 평화상은 개인이 아닌 ‘튀니지 국민 4자기구’에 돌아갔다.

그동안 평화상 수상자는 테레사 수녀, 달라이 라마, 넬슨 만델라 등 여러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알베르트 슈바이처 만큼 위대한 인물이 있었을까.

슈바이처는 인간 최고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그는 빈곤하고 병마가 들끓는 오지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 주민들과 고통을 함께 하다가 현지에서 죽어간, 그야말로 예수그리스도 다음 가는 위대한 삶을 살고 간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빈대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7,000명을 먹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지만 슈바이처는 인간의 몸으로 직접 오지에 가서 목숨을 내놓고 고통속에 헌신적인 베품을 실천했다.

프랑스인 사상가 파스칼은 “아름다운 행위들은 숨어서 했을 때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슈바이처야 말로 일생 인류최고의 선을 베풀어 두고두고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다. 독일계 프랑스인인 그는 의사이자, 목사였으며 과학자이고 철학자, 사상가, 그리고 생물학자이면서도 음악과 미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30세까지 많은 공부를 하고 이후부터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면서 평생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이를 아프리카에서 실천해 73세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이때 받은 상금도 아프리카에서 문둥병환자 치료를 위한 한센병원을 짓는데 쓰고 마지막 임종도 그의 수고와 땀과 눈물이 서린 아프리카 땅에서 맞았다.

이런 배경은 “우리는 당연히 이 세상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겪는 고통의 짐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겨 해외에 있던 저명한 프랑스인을 모두 압송 할 때,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도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때 일어난 일화들은 그가 살면서 남에게 얼마나 베품을 많이 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포로가 되어 아내와 짐을 잔뜩 꾸려 힘겹게 걸어갈 때 어떤 장애자가 와서 짐을 들어주겠다고 제의한 것, 호송길 노자가 떨어졌을 때 누군가 와서 여비를 보태준 일. 포로로 배를 타고 갈 때 독일인 병사가 오히려 그에게 원고를 쓰도록 책과 책상을 마련해준 일 등은 그에게서 모두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되갚음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슈바이처처럼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하지만 이런 삶을 살고 간다면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생이겠는가. 우리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명제앞에 슈바이처의 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노벨상 계절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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