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존심과 똥고집

2015-09-25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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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사회 규모가 커지고 성장하면 할수록 큰소리가 수시로 나고 다툼이 많아진다. 한사람에서 두사람, 세 사람이 모이면 벌써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하는 사소한 것부터 의견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로 통하는 사람들은 금방 의견이 통일되지만 일이 커지다보면 하다못해 점심값 계산부터 서로 하겠다고 하다가 ‘너, 나 무시하냐’는 식으로 그야말로 자존심 싸움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녀간의 케케묵은 자존심 싸움을 시작으로 친구, 직장 동료간에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손금이 없는 자’는 자존심 없는 인간을 비아냥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존심을 부릴 것인지, 버릴 것인지’는 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나 결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존심이라 미화된 것 중에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자존심인 ‘똥고집’인 경우도 많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는 마음을 일컫는다. 자존심(Pride, Self-respect)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자존감을 바탕으로 한다. 즉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하는 용기도 포함된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높이고 남의 존경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똥고집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여기까지만 공통점이다. 그릇된 자기주장을 일삼아 자신과 남에게 상처를 준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란 그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는데 사람들은 그걸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기 싶다.

맨하탄 보석상이나 메트 뮤지엄 기프트 센터 등에 빠지지 않고 진열된 것이 에나멜과 금으로 치장된 ‘파베르제의 달걀’ 공예품이다. 진품은 수천만 달러, 모조 공예품 가격조차 수백~수천달러일 정도로 인기다.

1887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부활절을 맞아 황후 마리아 페오도르브나에게 선물한 ‘파베르제의 달걀’은 정교한 세공에 화려한 장식으로 달걀 모양을 열면 안에서 황금마차나 수탉, 궁전 등이 나오는 최고급 보석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후 30년간 부활절 달걀을 선물하는 전통을 이어갔는데 보석 세공의 거장인 카를 구스타보치 파베르제는 단 50개만 만들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신, 가난한 더부살이 삶을 산 대공비와 파베르제의 달걀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인용)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누이동생 크세니아 대공비는 사촌지간이었던 영국의 조지 왕과 메리 왕비가 마련해 준 윈저 공원안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메리 왕비는 이따금 함께 차를 마시자며 대공비를 초대했다. 그날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메리 왕비가 새로 구입한 공예품을 대공비에게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금 세공사 페터 카를 파베르제(1846~1920)가 제작한 아름답고 예술적인 둥근 계란 모양의 장식품이었다.

그러고는 메리 왕비가 알에 새겨진 ‘K’ 라는 이니셜이 무엇을 뜻할 것 같냐고 물었다. 대공비의 이름 크세니아는 영어로 쓰면 ‘Xenia’이지만 러시아어로 쓰면 ‘K’로 시작된다. 그 파베르제 알은 대공비가 첫 아이를 낳자 남편이 선물 한 것.


자신의 것이었던 그 보석알을 앞에 놓고 대공비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K’가 크리스포트(Kristof)의 첫 글자가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크리스토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리더라는 뜻이 있음)

러시아 혁명후 귀족들은 대거 서유럽으로 갔고 그곳에서 택시운전사, 웨이터, 집사로, 다른 나라 왕의 식객 노릇을 해도 자존심은 버릴 수 없었던 것,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 존재하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다. 한인사회에 좀더 성숙된 자존심을 지닌 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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