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봉숭아 꽃물

2015-09-19 (토) 정유경 <강사/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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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좋게 지하철에서 앉게 되면 반대편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신발에 눈이 간다. 고된 하루의 무게를 견뎌냈을 그 묵묵함에 경의라도 표하고 싶다. 특히, 여름철이면 샌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여성들의 발가락들이 눈에 띈다.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발톱들은 우중충하고 어두침침한 지하철을 벗어나 성당의 스테인 글라스처럼 조화로운 모자이크를 연상케 한다.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발톱 길이에 새빨갛게 칠한 멋쟁이 발가락들, 나는 다르다고 강조하듯 시커멓게 칠한 반항의 발가락들, 여유롭게 네일살롱에서 마사지와 정교한 페디큐어로 가꾸어진 우아한 발가락들. 모두 자신만의 패션 감각을 뽐내며 맞은 편 자리에서 “너는 어때?”라며 나를 쏘아보는 듯했다.

엉겁결에 내려다본 내 발가락들은 작년 여름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의 연한 분홍빛이 발톱 가장자리에 반달모양으로 가까스로 걸쳐있다. 엄마보다 더 오래 전부터 악귀를 물리치고 봉숭아 꽃물이 가을 서리 내릴 때까지 손톱에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속설을 믿고 어린 시절을 빨간 손톱 발톱으로 보냈었는데 점점 자본주의에 밀려 매니큐어가 자리를 대신했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봉숭아 꽃물이 손톱, 발톱 무좀을 방지해 준다는 이야기에 팔랑 귀가 되어 남편과 나는 매년 여름 서로의 손톱과 발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 준다.

매년 늦봄에 남편은 학교공터에 수업 간간히 텃밭을 가꾸었고 한여름이 되면 나는 수확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수확물을 열심히 거둬 주머니에, 봉투에 넣고 있노라면 텃밭 가장자리에서 연분홍, 진분홍, 빨간색으로 피어 오른 봉숭아꽃을 만난다.

내게 손짓하는 그 추억들에 이끌려 꽃과 잎사귀를 한 웅큼 따다 남편과 서로 손톱, 발톱에 물들여 주는 일로 저녁시간을 보내곤 한다. 남편은 약지와 새끼손가락, 그리고 10개 모두의 발가락, 나는 20개 모두의 가락들에 봉숭아와 맥반을 짓이긴 반죽을 올리고 비닐로 덮어 실로 칭칭 감아놓는다.

이다음부터가 인내의 연속이다. 설렘 때문인지 손가락과 발가락에만 감아놓은 실들이 왜 온 몸의 신경계를 칭칭 감은 것 같은지 밤새도록 선잠으로 뒤척인다. 다음날 아침 조심조심 풀어 헤치면 예쁘게 물든 손톱 발톱에 덤으로 시뻘겋고 퉁퉁 불은 손가락 발가락이 짜잔~하고 나타난다. 세련되게 투명 매니큐어로 주변을 칠해놓지 않은 때문이다.

이젠 살에까지 번진 봉숭아 꽃물이 빠지고 예쁜 손톱에만 남게 되기까지 만나는 사람마다의 질문, 코멘트를 잘 받아주며 기다려야 한다. 신기함과 부러움에 가는 곳마다 참 많이도 물어온다. 이야기의 버전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울 밑에선 봉선화야~”라는 애조 띤 가사보다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초원의 빛, 꽃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으로 맺는다.

올해도 남편이 때 늦은 봉숭아꽃을 구해오길 기다리고 있다. 무좀은 차제하고라도 남편의 첫사랑이 나타날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나도 첫사랑이 그립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주 살짝?

<정유경 <강사/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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