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름 없는 이들

2015-09-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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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1920~1930년대는 유럽이나 한국이나 사회, 문화적 변화가 극심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때의 파리와 서울로 가보고 싶다.

1920년대의 파리는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보듯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피카소 등 진정한 예술가들이 정열적으로 활동하던 파리 최고의 전성기였다. 여기에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피난길을 떠났던 러시아 망명귀족들이 파리로 몰려들면서 서유럽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한국 역시 1920년대는 조선문단의 전성기로 대중들의 명작에 대한 독서 열기가 뜨거웠고 활발한 민족 운동과 함께 여성의 근대교육 운동이 활발했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물밀듯 들어와 지금의 한국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시기이기도 하다. 1930년대는 민족의 독립과 진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이 제대로 먹고, 입지도 못하면서 일본과의 전장에 나섰는 가 하면 댄스홀에 몰려든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은 신근대 문물에 심취했다.

이 시대를 다룬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을 보았다. 영화는 1933년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서 조선의 경성으로 온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다. 한국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조진웅 분), 폭탄전문가 최덕문(황덕삼 분) 세 명의 암살자와 이들을 노리는 청부살인업자들, 그리고 의심스런 임시정부 경무국대장...... 영화에는 김구, 김원봉 등 실존 인물도 나온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빠르게 전개되던 영화가 조금 심심할라치면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과 영감(오달수 분)이 등장해 멋스러움과 웃음을 제공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실제의 역사가 처단하지 못한 친일파이자 변절자인 염석진(이정재 분)을 암살한다. 우리 모두 나라를 팔고 동족들에게 더욱 악랄했던 친일파들이 신생 한국에서 재빨리 변신하여 대를 이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모습을 그냥 보여주기에는 관객들 마음이 너무 씁쓸하겠다 싶었는지 감독은 청산하지 못한 역사인 친일파 암살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동안 이 시대를 다룬 한국영화가 ‘아나키스트’를 비롯 몇 작품 있었지만 흥행에 성공 못했었다. 그런데 ‘암살’이 현재 1,300만명에 육박하는 관객 동원에 성공한데는 20대 젊은이들의 참여가 컸다고 한다. 진정한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젊은이들이 조국해방의 밑걸음이 되었다는 것에 공감했고 남북 분단이란 현실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 흥행과 더불어 한국 역사 서적들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한국의 서점들에서는 ‘암살’ 개봉이후 약 한달간 한국사 도서매출이 지난 해 같은 기간보다 22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역사서 주요구매층이 40~50대 남성이 아닌 20~30대 여성의 비중이 커진 점이 특징이라는데, 소설, 에세이 등 주로 문학 장르를 구매하던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 여성독립투사 등 역사 속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

지난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이었다. 뉴욕에서 성장한 1.5세, 2세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말 한국학교에 다니면서 잠깐 배운 한국역사 지식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나라 이름 정도나 알까.

8.15해방은 우리 힘이 아닌 외세 세력인 연합군이 찾아주었다. 그래도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 한 안옥윤의 말처럼 끊임없는 저항으로 대한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보여줬기에 그나마 이뤄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으로 찾은 해방인데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남과 북은 남남이 되어 다른 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도 못보고 스러져간 그분들에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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