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세계를 찾는 걸음마

2015-08-3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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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어린이가 걸음 연습을 하듯, 세상 물정을 배울 때도 같은 과정을 밟는다. 어린이는 가까스로 혼자 일어서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이 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간다. 미국 문화권인 이곳에서 한국문화를 익히는 일도 걸음마 연습처럼 시작된다.

지난 광복절 행사는 이날의 취지를 살리는 행사였다. 부모님과 함께 모인 어린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광복절’은 해방 기념일이다. 필자는 말 없이 태극기가 붙어있는 한국지도를 벽에 붙였다. 다음에는 말없이 태극기를 떼고, 그 자리에 일본 국기를 붙이고, 그 밑에 ‘36년간’이라고 쓴 종이도 함께 붙였다.


어린이들은 이상스러운 얼굴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일본국기와 36년간이라고 쓴 종이를 떼어냈다. 그리고 한국지도 가운데 큰 태극기를 붙였다. 어린이들이 서로 얼굴을 보다가 손뼉을 쳤다. 이어서 그 중의 몇몇 어린이에게 태극기를 흔들게 하였고, 다같이 태극기 노래를 불렀다. 이것으로 광복절의 뜻을 알게 되었기 바란다.

다음에 어린이들은 12가지 놀이를 시작하였고, 놀이 한 가지가 끝날 때마다 담당자의 서명을 받게 되었다. 그것들은 자유롭게 한국문화를 익히는 놀이었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말을 한글로 써보기, 태극기 색칠하기, 붓글씨 써보기, 탁본 뜨기, 한국과자와 식혜 맛보기, 태권도 해보기, 한복 입기 등이었다.

어린이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것부터 실제로 체험하면서 한국놀이의 모든 과정을 즐겼다. 한국말 써보기 책상에 갔더니 ‘엄마’ ‘좋아요’ ‘맛있어’… 등 어린이가 한 말을 담당자가 한글로 써주면, 그것을 보고 제각기 크레용으로 썼다.

한복 입기 모임에서는 제각기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찾아입고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그 자리에 모인 어린이들은 한국문화를 글로 읽거나,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고, 제각기 체험하면서 익히고 있었다. 그들이 같이 데리고 온 외국 어린이까지 함께 깔깔거리며 한복을 입고 재미있는 몸 움직임을 보이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 모든 시도는 한국문화를 걸음마로 익힐 수 밖에 없는 현지의 사정 때문이다.

‘문화’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적 사회적 활동 즉, 종교, 과학, 예술, 법률, 정치, 경제 따위의 국가와 민족 전체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의 총칭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각자가 속한 문화권의 공기를 마시며 성장한다. 각 민족이 지니고 있는 문화는 시대와 더불어 변화하고 발달한다.

우리는 한민족의 독특한 문화권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이곳 우리 자녀들은 미국문화권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적인 생활을 그대로 이곳에 옮길 필요는 없지만, 우리 생활이 한국문화를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속에서 한국문화를 살리는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한국문화가 인류문화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왜 한국어를 가르치나? 한국어는 한국문화의 중핵이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는 한국어 속에 녹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문화 속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두 가지를 함께 이해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한국음식의 특색을 알리면서 수저의 이름과 사용 방법을 연습해 보고, 말이나 글로 익히면 효과적이다. 온돌방의 구조원리를 알게 되면 거기에 따르는 가족간의 예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 조상들이 합리적으로 생활하기 위한 지혜였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한국문화를 배우는 까닭은 이러한 조상들의 지혜를 본받고 이를 이어가려는 것이다.

미국문화가 다양하고 찬란한 까닭은, 여러 민족 문화의 장점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고, 인류문화에 공헌할 수 있는 광장이고, 하이웨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뜻있는 날 독특한 문화의 걸음마를 걷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제발로 걷고, 뛰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각자의 내 세계를 찾는 걸음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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