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님 그림자

2015-08-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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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는 곧잘 음식을 싸들고 오는 버릇 아닌 버릇이 생겼다. 손님과 만나 식사를 하고 돌아올 때에도 싸오고 동창들과 만난 다음에도 싸온다. 심지어는 마트에서 장을 본 다음에도 송편 한두 개 정도 사서 들고 오는 것은 꼭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시 아내라는 사람이 뭘 싸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알뜰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듯 생각과 습관이 바뀐 것은 내가 그렇게 싸오는 음식을 은근히 반기고 기다리다 보니 그 깔끔한 성미가 이렇듯 변해버렸나 보다.

어릴 적 어머님은 삯바느질로 겨우겨우 우리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머님이 아침 일찍 집을 나가면 저녁 늦게야 돌아오셨는데 그러다보니 온종일 빈 방을 지켜야 하는 것은 어린 내 몫이었다. 비록 한 칸짜리 작은 방이었지만 서쪽 벽에는 내가 턱걸이 하면 겨우 창턱이 눈에 걸리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 때쯤이면 이 작은 창문을 통해 온 방안으로는 붉은 석양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빈방에 노란 석양이 넘실댈 때에는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몸서리치게 외롭고 슬프게만 느껴져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다 울다 지칠 때쯤이면 이제 막 서산으로 빠지고 있는 커다란 햇님은 말랑말랑, 금방 터질 것 같은 붉은 홍시로 변해있었다. 해도 하루를 다 보내고 나면 힘이 빠져 늙어지나 보다.


낮에는 너무 이글거리고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가도 저녁이 되어 서산에 걸리면 저토록 힘도 없고 맥도 빠져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조금도 눈이 부시거나 시리지도 않게 되어버리니... 그런 햇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울음소리는 딸꾹질로 바꾸어지고 이제 그 딸꾹질마저도 점점 사그라들면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밤늦게 돌아오신 어머님은 내 볼 따귀에 남아있는 눈물자욱을 보고 사내 녀석이 그 정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계집애처럼 눈물을 흘렸다고 퉁을 주며 싸온 보자기를 밀어주신다. 언제나처럼 어머님이 가져오는 보자기 안에는 내 먹거리가 들어있었다. 주인집에서 내주는 밥을 먹지 않고 주먹처럼 돌돌 뭉쳐 싸온 밥뎅이나 누릉지 혹은 산자부스러기 등이 그 안에 소중히 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음식은 주인집에서 매번 주는 게 아니다 보니 어떤 날은 빈손일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밭고랑을 뒤져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나 하다못해 배추꽁다리라도 꼭 주워서 보자기에 싸오셨다. 그럼 나는 허겁지겁 이것으로 빈속을 채웠는데 그것이 비록 까칠까칠한 겉보리 밥알이었을망정 입안에서는 마치 꿀밥처럼 혀끝에서 떨어지질 않아 어머님이 슬픈 눈으로 지켜보시는 것도 잊은 채 달게 달게 다 먹어치웠다.

그런 궁핍했던 유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 이제는 자식들까지 다 키워 내보낸 작금에도 어머님이 싸오셨던 그때의 보자기 맛은 잊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내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에는 은근히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게 되고 보자기 안에 혹시 내 먹거리가 없기라도 하면 어린애처럼 그렇게 섭섭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눈치를 알아차린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올 때에는 으레 음식꾸러미를 내 앞에 내미는 것이 요즘 아내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아내가 외출을 준비하고 있으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여보, 일찍 돌아와요. 볼썽사납게 뭘 싸들고 올 생각 말고…”

김태진<작가/리빙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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