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히틀러는 왜 미술품들을 약탈했나?

2015-08-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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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1889-1945)는 나치정권의 총통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회화, 조각, 공예 작품 등 무려 500만점의 미술품을 약탈하기 위해 ‘엘른자츠타프’란 특수 부대를 만들어 최측근 심복인 ‘하인리히 괴링’의 휘하 기갑부대를 동원, 미술품의 광적 탈취를 감행했다.

히틀러의 나이 13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는 비엔나국립미술 아카데미 입학에 두 번씩의 입학을 시도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학교 유대인 학장을 찾아가 자신이 두 번째도 합격되지 못한 원인을 따지기도 했다. 학장은 ‘우리 학교에 입학할 실력이 못 되고 창의성도 없다’로 혹평했다. 당시 미술의 조류는 입체주의 다다이즘 및 야수파적 경향의 그림들이지 그가 그리는 평범한 스케치풍의 그림은 아니었다. 1934년 8월, 나치 총통으로 권력을 행사, 미술품 착취의 범죄행위는 그가 미술가의 꿈을 꺾은 국립미술아카데미의 유대인 학장 때문이란 ‘트라우마’ 적 생각을 가졌다.

한편 그는 현대미술인 야수파 및 초현실주의 작품은 아리안족인 독일인들의 정서를 오염 시킨다고 해 650여점의 ‘걸개’ 그림 전시로 야수파화가들을 조롱하고 일부는 팔아 나치 정권을 위한 전쟁 비용으로 충당하고 많은 작품들을 여러 곳에 숨겨두기도 했다.


종전이 되면서 연합군이 발견한 제3국 등 여러 지역에 미술품들을 숨겨 놓은 1,000여 곳의 약탈된 미술품을 찾기 위해 미군 공병대를 주축으로 350여명의 군인들의 특수 부대로 ‘더 모뉴맨트 멘’(The monument men)이 조직되어 700여년 된 오스트리아 ‘알타 우세’ 소금광산과 고성인 ‘노이슈반슈타인’등에서 많은 미술품들을 찾아냈으며 퇴폐미술전에 출품된 작가, 피카소, 르노아르, 마티스, 샤갈 등의 작품들이 독일 뮌헨의 한 아파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부대는 ‘히틀러의 손에서 ‘미켈란제로를 구하라’는 작전명으로 ‘아이젠 하워’는 ‘미술품들은 인류문명의 큰 상징들’이라며 다시 찾는 작업을 독려해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성모자상’, 1942년이 약탈한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등 불후명작들을 찾는 데 성공했다.

나치독일이 프랑스에서 10여만 점의 미술품을 약탈했으며 현대미술을 인정하지 않은 히틀러는 1만6,000여점의 작품들을 소각하거나 기타 외국에 팔아넘기기도 했기에 이를 모두 찾기는 어려운 작전이지만 이 특수부대는 1000년을 통해 전래되어온 문화의 표본으로 서의 미술품을 지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히틀러는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로 인구 1억명의 세계 최대 수도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려 했고 오스트리아 ‘린츠’에 초대형미술관인 ‘총통 뮤지엄’ (Fuhrer Museum)’을 지어 약탈한 예술품들을 모두 진열, 전시하려는 큰 계획을 했는데 ‘루이14세의 ‘루브르 미술관’, ‘교황청의 ‘바티칸 미술관‘, ‘대영박물관’을 능가하는 규모의 역사적 명작들을 진열 하는 계획의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1945년 4월 히틀러가 자살하기 전에 남긴 유언장에서 ‘나는 수년간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고향 ‘린츠’에 대형미술관을 세우기 위해서 미술품을 모았다’고 했다. 감추었던 미술품들은 2차 대전이 종식 된지 70년이 넘었지만 일부 몰수 된 작품들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현재,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명작들의 소유권 및 공소시효 문제 등은 미완의 문제가 되고 있으나 값진 예술품들이 세계 여러 미술관 및 기타 각국의 많은 기관 등에 전시 및 보존되고 있어 인류 문화의 영구적 보존가치로서 기쁜 일이라 할 수 있다.

김광현 <전 대학교수/포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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