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철학하며 사는 순간들 (김선윤 / USC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사서)

2015-08-22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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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에 대해서든 철학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사랑에 빠지면 사랑이 뭔지 생각하기 시작하잖아요.”<수잔 손택의 말>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수잔 손택은 ‘행동하는 지식인’ 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비평가, 소설가, 연출가이다. <수잔 손택의 말>은 에디터이자 작가인 조너선 콧이 1978년 파리에서 마흔 중반의 그녀를 인터뷰한 책이다. 어렵고 심오해 보이는 철학과 생각과 존재에 대해 이렇듯 간단하게 풀어내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매료되었다.

“가만, 지금까지 입고 먹고 자고 일하고 놀고 그리고 사랑하고 등등 무언가를 계속해 왔고 뭘 하며 생각도 해 왔으니 나도 철학을 계속 해왔다는 얘기?” “그럼 내가 한 생각들 중에서 내 철학이라고 이름 붙여 내 놓을 만한 철학이 있을까?”

내가 존경하는 이가 철학을 철학가들의 몫에서 나 같은 평인의 몫으로 돌려준 사실에 신이 났다. 머리 한켠에서 내 철학 인생을 헤집던 중 한 기사 헤드라인에 눈이 꽂혔다. ‘엄마를 벌주는 사회’ 라는 어느 한국 신문기사였다.


헤드라인에서 짐작이 가능하듯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에서의 남녀 차이에 대한 글이었다. 여전히 가사부담은 여성에게 치중되어 있고 여기에 육아까지 더해진 ‘엄마’들이 무한경쟁 일터까지 겸하며 겪는 어려움을 ‘고통의 형벌’로 필자는 묘사했다.

기사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에 나도 모르게 반응을 했다. ‘맞아 맞아’ ‘아니 이건 아니지’ ‘흠~~’ 등의 다양한 반응과 함께 이 반응을 지원하는 내 나름의 이론과 저장된 경험 데이터들이 저절로 기억에서 추출되어 올라왔다. 한때 “나도 ‘아내’가 필요해! 많을수록 좋아!” 라고 외쳤던 기억에 새삼 빵 터져가며 말이다. 나도 ‘엄마’ 직책에 대한 철학은 그런대로 해온 거라며 나름 으쓱해졌다.

나 역시 별 개념 없이 일하는 엄마의 길로 성큼성큼 들어섰었다. 당연히 일 가정 모두가 자주 범벅이 되었고 돌아보면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들이 쌓여있다. 이 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개인적인 ‘엄마’ 직 수행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몫이 있었다. 내 아이들을 포함한 다음 세대들의 기성세대 노릇이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사회로 그들을 밀어 넣은 것도 미안하고, 헤집고 훼손시켜 놓은 환경문제를 나 몰라라 떠넘기고 가는 것도 미안하고 … 날을 새도 모자라게 온통 미안한 일 투성이다.

며칠 전 온라인 신문에서 본 비디오 클립이 떠올랐다. 바다거북이 코에 박힌 플라스틱 빨대를 뽑아내는 과정을 찍은 비디오였다. 펜치로 잡아당기는 데도 안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거북이 코에서 피가 흘렀다. 거북이가 불편해 하는 것이 역력했다. 가까스로 뽑아낸 빨대는 10센티가 훌쩍 넘었다. 이런 빨대가 거북이 한쪽 코에 얼마 동안인지 모르게 박혀있었던 것이다. 너와 내가 생각 없이 버린 것일 수도 있고 엉터리 쓰레기 처리 과정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앞의 수잔의 말에 귀가 쫑긋했던 것은 뒤범벅으로 살아온 와중에도 나름 열심히 생각하며 열심히 철학 했노라 하면서 이 미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위안 받고 싶어서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투성이인 삶의 순간들도 철학 하는 순간으로 업그레이드 해 주는 수잔 손택의 말이 내게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한 마음들에 휘둘리고 마는 대신 거기서 다시 제대로 된 생각을 해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녀처럼 ‘행동하는 정신’이 되어 내 아이들과 다음 세대들 그리고 멀리는 바다 거북이까지 내 생각 안에 품고 같이 살피며 살아 갈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의 체증이 풀리고 힘이 솟는다. 나를 힘내게 하는 또 다른 그녀의 말을 새겨본다.

“삶의 숨결이 없다면 인간의 몸은 시체다. 생각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죽는다. 지성적이라는 건, 내게는 어떤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은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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