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월의 그날을 돌아보며

2015-06-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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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 우리민족이 겪었던 골육상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던 6.25 세대들은 매년 이때가 돌아오면 그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많은 상념에 젖는다. 지금 생존해 있는 60-80대 나이의 대부분은 그 당시 직접 참전을 했건, 안했건 전쟁의 무서움과 참상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다.

당시 치안유지를 할 정도의 경무장한 한국군은 소련제 탱크, 중화기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50년 6월25일 새벽 급습남침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한 달도 안 돼 낙동강 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 존립이 촌각을 다툴 때 미군을 중심으로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국이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들은 전혀 알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국민을 돕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한국 전쟁 3년 동안 미군은 연인원 180여만 명이 참전하여 5만4,000여명이 사망하고 12여만 명이 부상, 포로 또는 실종되었다.


그들의 희생이 우리 조국을 구해 주었고, 현재 세계 15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 발전의 근본 동력이 되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기회가 오면 그들에게 개인적이라도 감사와 경의를 표해야 인간의 도리라는 부담감을 갖고 살아왔다.

4년 전 필자가 다니는 아콜라교회에 듬직한 장로 한 분이 새로 오셨다. 참전용사의 은공을 잊을 수 없어, 30여 년 전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참전용사를 초청, 보은 만찬을 베풀거나 그분들을 인솔하고 고국을 방문하는 등 우리가 그들의 은공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몸소 꾸준히 실천해온 분이다.

그의 제의에 담임목사님과 제직들도 적극 찬동하여 2012년부터 매년 6.25주기에 맞춰 매년 그 들을 교회로 초청, 감사만찬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초청대상은 뉴저지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참전용사 NJ Daejon Chatter에 속한 20여명 내외이다.
금년에도 지난 6월20일 네 번째 초청행사를 거행했다.

첫 회에는 약 20여명이 참석하였었는데 해가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올해는 15명 정도가 참석했다. 매년 한, 두 분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서글픈 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쟁 당시 그들의 나이는 18-20세로 고교 졸업 후 징집되어 신병훈련을 끝내자마자 한국으로 파병됐다는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이 너무 가난해 농촌에서는 토굴 같은 집에 사람들이 사는데 놀랬다고 했다. 전투현장에서는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라 총알이 쉴 새 없이 귓전을 스치고, 적의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질 때는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기가 질려 하나님에게 “제발 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버티었다고 했다. 매일 죽음을 보았고 죽음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공포가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날씨는 왜 그렇게 사나운지, 밤중에 불어 닥치는 매서운 추위는 적의 총탄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들과 얘기하다 보면, 낫선 타국 땅에 와서 엄청난 고통을 겪고 희생하였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60여년 후 현재 한국의 기적 같은 발전상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당시 겪었던 고생은 눈 녹듯 사라지고 인류 보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큰일을 했다는 보람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한국인이라면, 특히 그 참상을 몸으로 체험한 6.25세대라면 그들의 은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살아있을 때 자주 교류하면서 따뜻한 보은의 말을 전하는 것도 우리세대가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해 본다.
김상준 <비영리단체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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