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들에게 배우다.

2015-06-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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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작가>

한국 영화계에서 불같은 성격의 제작자 K씨의 ‘제주도 땅’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중의 하나이다. 한번은 촬영차 제주도로 내려가 십여 마리의 말을 빌려 전투장면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말들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는 바람에 시간은 오래 지체되고 그 바람에 옆에 있던 감귤밭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밭주인이 촬영기 앞을 가로막고 망가진 감귤 밭을 변상하라며 시비를 거는 바람에 촬영은 중단되고 감독은 밭주인에게 멱살잡이까지 당하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K씨는 결국 문제의 감귤 밭을 몽땅 사버리는 조건으로 밭주인을 쫓아내고 가까스로 촬영을 마무리 할 수가 있었다. 그날 저녁 시내로 돌아와 관계관들과 술잔을 나누며 뜻하지 않게 사들인 감귤밭 이야기를 꺼내며 이곳에 연고가 없던 K씨는 그것을 옆에 있는 기생에게 선뜻 넘겨주어 버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K씨의 영화사는 망했고 K씨는 채권자들을 피해 몰래 제주도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옛날 감귤 밭을 건네주었던 기생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사이 땅값이 크게 올라 기생은 그곳에 작은집을 짓고 맛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 K씨는 뜻하지 않은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그동안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곳이 어디 제주도뿐이겠는가. 한국땅 전체가 금값이 되어 이제는 전국 어디에도 기생에게 선뜻 건네줄 땅은 없을 것이다.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온 우리네 이민1세대도 고국에서 땅 팔고 집 팔아 이곳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때 헐값으로 팔았던 부동산이 그사이 하늘처럼 치솟아 지금은 우리네 형편으로는 언감생심,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신기루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이민자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런 사람 중에 P라는 분이 있다. 그는 이곳 미국 땅에 와서 개미처럼 일을 해서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아 야채가게는 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은퇴하여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외형상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법한 그가 이상하게도 항상 불편한 얼굴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아들은 이를 노인성우울증으로 보고 하루는 여행을 권해 드렸다.

“아버님, 한국도 이제는 살만하여 전국 어딜 가나 편하게 볼거리가 많아졌답니다. 게다가 아버님의 고향땅은 관광지가 되었고 특히 아버님이 사셨던 집은 관광호텔이 되었다잖아요. 그러니 이참에 고향에 들려 편안히 푹 쉬었다 오세요.”
그 말에 P씨는 펄쩍 뛰었다.

“고향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왜요? 다른 분들은 고향을 가고 싶어도 여유가 없어 못가는 분들이 많은데 아버님은 왜 말도 꺼내지 말라는 거지요?” 그 말에 P씨는 용기를 내어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고민을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차라리 이민을 포기하고 고향땅에 눌러앉았더라면 지금쯤 엄청난 재산가가 되었을 텐데 공연히 이민을 오는 바람에 가족들 모두에게 고생만 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에 아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원참, 아버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필요 이상의 재산이 우리에게 복이 되었을지 화가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오히려 이곳에서 손수 땀 흘려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님은 재물 이상의 더 큰 가치를 우리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순간 P씨는 커다란 해머로 한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아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후 P씨는 양로원에 새로 일자리를 구해 치매노인들을 돌보는 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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