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25동란의 추억

2015-06-27 (토)
크게 작게
전미리<아나운서>

6.25 동란 65주년을 맞이하면서 전쟁 속에서 겪은 자기를 회상하는 화제가 다양하다. 끔찍한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몸을 떨며 마음 아파한다. 그러나 산과 들, 바다를 좋아하는 나에게 떠오르는 몇 가지는 아련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피난길에 여기저기 묵었던 시골집과 몇 달을 살았던 골짜기의 움(굴)집 생활은 어린 나에게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던가 보다.

6.25전 우리는 해금강 바다 근처 큰집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다. 해당화 꽃향기를 맡으며 조개를 잡고 모래성을 쌓고 갈매기와 함께 뛰어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모래사장을 떠나며 나에게 소리쳤다. “ 얘야! 어서 집에 가거라!” 순간 나의 머리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미끄러지듯 구선봉(낙타봉)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피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앞 바다에 큰 군함이 정박했고 남한군 한 소대가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는 모래사장에 굴러 나오는 노란 껍질을 보았다. 그것을 집어 들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향기롭고 달콤했다. 이것이 무엇일까 하고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군인 아저씨가 말했다. 그것 코쟁이(코 큰 사람들)들이 먹는 거야. 나는 그 코쟁이들이 사는 나라(미국)에 가서 이 향긋한 (오렌지)열매를 실컷 먹고 싶어 멀리 수평선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7살이었다.

그 후 우리는 집을 떠나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살았다. 북진했던 국군이 후퇴하고 있다고 하고 인민군과 중공군이 마을을 지나가곤 했다. 길이 얼어붙고 눈이 쏟아지는 겨울밤 우리는 남쪽을 향해 쑥고개를 넘고 있었다. 너무도 추워서 나는 걸음을 잘 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끌려갈까 두려워 초를 다투어 걸었다. 얼어 죽을 것 같은 밤길에서 속도가 느린 가족들을 아버지는 하수여리 친척집에 맡기며 3일 만에 데리러 온다고 약속하고 혼자 떠나셨다.

어머니는 양미리 한 마리를 그 집 처마 끝에 걸어놓고 아버지 오실 날을 기다렸다. 3일이 지나 한 달이 되어도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 일곱 형제를 이끌고 고향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깊은 골짜기 움집(반 지하굴)에서 살게 되었다.

노랑 저고리를 입은 둘째 언니는 산나물을 캐러 들에도 나가고 산봉우리에 앉아 동해안으로 국군이 들어오길 소원하며 망을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모를 쓴 국군이 짚차를 타고 남쪽에서 북(고성)을 향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언니는 뛰었다. 골짜기 움집에 누워있는 우리에게 달려와서 소리쳤다. 빨리 일어나 남으로 가야해. 국군이 보였어. 장질부사(장티브스 고열병) 를 앓은 우리 식구는 영양실조로 비틀거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신 곳 남한으로 가기 위해 움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골짜기를 내려오다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작은 어머니 움집에 남아 있거라. 우리는 아버지 만나서 너를 데리러 올께. 내가 빨리 걷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은 어머니네 움집 앞에 서서 언덕 아래로 멀어져가는 엄마와 형제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엄마를 그리워 할 것 같은 외로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순간 엄마! 하고 불렀다. 엄마는 돌아다보았다. “ 엄마! 나도 같이 갈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오라고 대답했다. 나는 골짜기 언덕을 구르듯이 뛰어 내려와서 어머니와 형제들 대열에 다시 끼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순간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때 이북에 혼자 남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기쁨조 일원이 되었을 것도 같다.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 예쁜 소녀였으니까.

초봄 우리가 남쪽을 향해 쑥고개를 넘었을 때 그곳에는 국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북진할 때 우리 집에 머물렀던 부대였다. 그래서 우리를 반겨주며 군 트럭에 우리를 태워주고 양양까지 실어다 주었다.


우리가 탄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데 길가 나무아래 서 있던 한 청년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집 아버지 여기 계세요!’.” 그 청년은 우리 이웃집 아들이었다. 길갓집 오막살이에서 아버지가 나오셨다. 우리 모두는 기쁨과 감동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헤어진 지 몇 개월 만에 만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금 뉴저지 땅에 묻혀있다. 무덤 양쪽에는 한국전 참전 용사의 무덤이 있고 성조기가 꽂혀있다.

우연의 일이다. 미국 군인에게 그토록 두 손 모아 감사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군은 하늘나라에서도 지켜주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감상에 젖는다.
6.25 65주년을 보내면서 내 생전에 남북통일의 날을 맞이하고 싶어 기도한다. 이북 사람들 내 고향(강원도 고성군 초구리 비무장지대) 사람들 모두 끌어안고 한 바탕 춤추고 싶다. 웃고 싶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 발전에 찬사를 보내면서, 한국에 민주주의를 심어준 미국에 감사한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