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깃발

2015-06-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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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청마 유치환의 ‘깃발’이란 시가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시인은 깃발을 보면서 이상향에 대한 향수와 그 비애를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현재 증오와 범죄의 상징이 된 깃발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17일 한 백인청년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 총기를 난사하여 무고한 흑인 목사와 신자 9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오래 묵은 인종갈등 문제를 수면에 떠올렸다. 이 백인우월주의자 딜런 루프가 방안, 정원 등 여러 장소에서 남부연합기를 흔들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나돌면서 이 깃발의 퇴출 논란이 일고 있다.

참사가 일어난 사우스 캐롤라이나 니키 해일리 주지사는 22일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잔인한 과거 인종주의의 상징인 그 깃발을 내릴 때’라며 현재 주정부 앞에 게양된 남부연합기를 공공장소에서 금지하는 법안발의 계획을 밝혔다. 주기(州旗)의 좌측 상단에 남부연합기가 그려져 있는 미시시피 주 정부도 남부연합기 퇴출에 동참의사를 밝혔고 앨라배마주는 24일 주의사당 앞에 걸렸던 남부연합기를 전격적으로 내렸다.


주 정부에 이어 미 최대유통업체인 월마트가 남부연합기가 새겨진 상품을 취급하지 않기로 했고 아마존과 이베이, 타깃, 시어스 등 온·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관련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차기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도 남부연합기는 예민한 사안이 되고 있다.

남부연합기는 150년 전에 끝난 남북전쟁의 유물이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는 링컨이 대통령인 연방정부를 탈퇴하여 반역정부를 세웠고 대통령과 부통령, 깃발을 새로 만들었고 전쟁을 치렀다. 이 깃발은 빨간 바탕에 대각선의 파란 띠가 지나가고 파란 띠 위에 노예제도에 찬성한 13개 주의 별들이 새겨져 있다.

원래 깃발이라는 것이 경건하기도 하지만 무서운 도구가 되기도 한다. 펄럭이는 천 조각이 신호나 정체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깃발은 세계의 국기는 물론 군기, 회사기, 교기, 협회기, 동호회기, 응원기 등등 모든 분야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전쟁에 나간 군대는 적지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적군의 깃발을 빼버리고 가장 높고 잘 보이는 기지에 아군의 깃발을 꽂는다.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의 요새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 해병들이 성조기를 꽂은 사진 한 장은 미 국민들에게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또 아들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리란 희망이 되었고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는 위안과 자부심이 되었다.

1950년 한국에 6.25전쟁이 발발하고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 전쟁 발발 90일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9.28 서울 수복시 서울 중앙청 돔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두 명의 해병대원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자랑스런 한국민의 역사가 되었다.

이렇게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야 할 깃발이 분열과 차별의 상징이 되어 누군가의 고통이, 눈물이 된다면 더 이상, 어디에서도 그 깃발은 휘날려서는 안된다.
엄연히 미국에는 자유와 기회를 상징하는 성조기가 있다. 세계 각국에서 이민 온 우리들은 성조기 앞에서 시민권 선서를 한다.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미국이 1865년부터 사용된 이 남부연합기를 추종하는 무리로 인해 온 나라가 갈등과 반목으로, 인종차별주의로 갈 수는 없다.

안그래도 지난 2개월새 뉴욕일원에서 아시안 여성을 상대로 한 폭행 사건이 10여건이다. 무분별한 증오범죄를 예방하려면 더 이상 남부연합기 같은 구시대의 유물은 박물관에서만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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