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린 사랑보단 정으로 살아요!

2015-06-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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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

정(情)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동양인 특유의 정은 말로 표현하기란 참 어렵다.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다는 말이 있듯이 정은 사랑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하다. “당신 없인 못 살아”하며 죽도록 사랑할 것 같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몇 년 안가 “내가 당신을 언제 봤냐!”는 식으로 헤어지는 그런 사랑도 있다.

그러나 정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정이 깊이 들면 쉽게 헤어지질 못한다. 곰보도 정이 들면 곰보 자리 하나하나에 사랑이 듬뿍 담긴다는 말이 있듯이 정은 사랑과는 좀 다른 무엇이 있다. 태양 같이 뜨거운 사랑이라면 달 같이 푸근하고 은은한 정이라 할까. 쉽게 헤어질 수 없게 하는 것이 정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정이 들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헤어져야만 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지난 6월1일 458명이 탄 중국여객선이 양쯔강 중류에서 침몰해 세월호처럼 완전히 거꾸로 뒤집혔다. 10여명은 구조됐고 400여명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배가 침몰하기 전 우젠창(58)씨와 아내는 제2의 허니문 여행으로 배에 있었다.

배가 점점 흔들리자 두 사람은 침대에서 손을 꼭 잡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크게 기울면서 객실 내 침대들이 넘어졌다. 이어 강물이 들이닥쳤고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더욱 꼭 쥐었다. 하지만 경사각이 더 커지면서 아내가 휩쓸려온 침대 밑에 깔리고 말았다. 물은 가슴까지 찼다.

불어난 물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우씨는 빨리 배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내의 손을 더 당겼다. 그러자 침대 밑에 깔린 아내가 “여보, 제 손을 놔요!”라며 스스로 손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 세찬 물이 들이닥치면서 우씨와 아내는 서로 갈라졌고 우씨는 물에 떠밀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헤엄을 치고 살아난 우씨는 4일 중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마지막 순간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을 것”이라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아내의 정. 아내가 남편을 살리게 한 이 정보다 더 깊은 정이 있을까. 타이타닉에서의 두 연인 중 남자가 여인을 살리고 죽은 것과 비교되는 장면이다.

행복전도사로 널리 알려졌던 최윤희(당시63세)씨. 그가 방송에 나오면 청취자들은 항상 즐거웠다. 그러던 그녀가 2010년 10월7일 남편(72)과 동반자살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밥을 굶어도 희망은 굶지 말라”고 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자살하기 전 수년 동안 지병을 앓았다. 병명은 전신성 홍반성 루프스와 합병증이었다.

우리를 더욱 놀랍게 한 건 자살 방법이었다. 남편이 최윤희씨를 도와 먼저 숨지게 했고 그 다음에 남편도 목숨을 스스로 끊고 아내의 뒤를 따랐다.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남편은 70대라도 아주 건장했다고 한다. 깊은 정이 들은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난 남편의 마음. 그녀를 따른 남편의 정. 얼마나 깊은 정이랴.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천사로 불리었던 장기려 박사. 1948년 북한의 제1호 의학박사다. 그는 6.25동란 중이던 1950년 12월 평양의과대학부속병원에서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다 어쩔 수 없이 국군버스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아내 김봉숙씨와 다섯 자녀들과는 이렇게 헤어졌다. 그는 이남에 내려와 의술을 펴면서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들고 평생 아내를 그리며 혼자 살다 1995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혼의 권고를 끝까지 마다한 장기려 박사의 아내를 향한 정. 감히 누가 흉내 내랴. 우젠창씨 아내의 손 뿌리침. “여보, 이젠 제 손을 놔요!” 아내의 정이 남편을 살렸다. 최윤희씨를 따라 함께 세상을 뜬 남편의 정.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린 사랑보단 정(情)으로 살아요!”란 어느 부부의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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