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강산 팔선녀와 나의 할아버지

2015-06-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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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윤 <교육가>

고성 장씨네는 8.15해방 전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지금의 이북)에 살며 마치 금강산이 자기네 뒷마당 인양 드나들었다. 해방되기 2년 전 나는 조부 장봉환의 첫 손으로 태어났다. 일정 하에서 편의로 고성 읍장이란 한직을 가졌으나, 재력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강원도 영웅, 또는 금강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그들은 할아버지의 중재를 구했고, 그는 양편에 공정한 해결책을 찾아 주었다. 그는 뛰어나게 키가 크고 인물이 좋았고 말을 잘 탔다.

할아버지는 금강산 사찰들이 필요한 쌀을 매년 공급했고, 사찰들은 답례로 잦을 까서 매년 가마니로 우리 집에 선물했다. 대주지승과 할아버지는 자주 만나 시국을 논했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한국(조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 믿었다. 그래서 금강산을 영화로(무성,흑백) 찍어 세계에 보급하기로 작정했다. 할아버지는 잘 알던 일본 대장성 백작의 허락을 받았고 ‘금강산 팔선녀’ 제작에 나섰다. 구룡폭포, 만물상, 해금강 등의 명소들을 배경으로 팔선녀를 연기할 평양기생 8명도 뽑았다. 그러나 가장 거대한 작업은 촬영 기구를 실은 트럭이 올라갈 도로를 닦는 공사였다. 할아버지는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다 들여 그 길을 닦았다.(그때의 길들이 지금도 사용된다 한다.)


드디어 금강산 팔선녀는 완성됐다, 그러나 대장성의 백작은 별세했고, 일본 정부는 이 영화에 민족주의적 성분이 있다하여 압수했다. 할아버지의 전 재산은 허물어졌다. 헌데 그의 장남(내 부친)이 당시 마카오, 상하이, 타이페이 등 항구도시를 선박으로 윤회하며 시작했던 목재 수출/수입 사업이 엄청난 수익을 보기 시작 했다. 이 뜻밖의 성공으로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재산은1-2년 안에 다 찾게 되었다. 그러자 8.15 해방이 왔다.

할아버지는 북한 공산당에 의해, 인민의 적이라 하여 장전감옥에 투옥됐다. 그곳의 옥장은 과거 할아버지 신세를 졌던 이라, 그는 사람을 시켜 할아버지의 탈옥을 도왔다. 알거지가 되어 장씨 일가는 피난민으로 남하한 후 서울서 가난하게 지냈다. 친지들의 알선으로, 할아버지는 그 후, 여수 항만장, 삼척과 원주경찰서장 등을 지냈고, 노년에는 서울서 야당청치에 참여했다. 나는 11세 부터 할아버지 밑에서 학교를 다녔고 방학 때만 부모님과 강원도에서 살았다.

삼척, 동해, 강릉, 속초, 거진, 또 이름 모를 비린내 나는 항구들. 거센 동해바다 물결과 설악산, 금강산 남단의 절묘한 풍취에 고향을 접했다. 통일 전망대 저 멀리 안개 속에, 삼일포와 해금강- 그들은 지금도 여기가 네 식구들이 꿈에도 못 잊어 하던 고향, 금강산 팔선녀의 고장이라고 손짓해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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