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요리하는 남자

2015-05-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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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한국속담 중에 유독 먹는 것에 대한 것이 많다. ‘배고픈데 장사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 ‘가을 상추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 ‘남의 이밥보다 제집 개떡이 낫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크다’ 등등, 요즘 한국 TV는 훈남 셰프가 직접 요리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대박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식샤를 합시다, 오늘 뭐 먹지, 집밥 백선생, 한식대첩, 삼시세끼 등등 드라마와 예능프로 뿐만 아니라 요즘은 누구나 컴퓨터와 소형 카메라만 있으면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남들에게 보여주는 개인 인터넷 방송을 할 수 있다.
한국TV의 요리 프로그램이 미주한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다.


직장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차승원이 만재도에서 딴 홍합으로 만든 짬뽕, 집에서 해보았다. ”, “이연복 셰프가 만든 순백색 튀김요리가 정말 특이해 보여” 하는 대화를 하고 어떤 친구는 생선 대신 온갖 야채를 넣어 만든 건강식 오뎅을 만들어서 먹어보라고 한다.
언제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요리가 남자들의 전유물이 되었을까.
1970~80년대 후덕하게 생긴 중년 아줌마이거나 말을 종알종알 잘도 하던 요리학원 원장님들은 ‘하선정 젓갈’ 같은 이름으로만 남고 TV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로맨틱 러브 드라마에 등장하더니 유명 요리사들이 직접 TV에 나와 요리 경쟁을 벌이며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으로 불리고 있다.
프로그램마다 다 특색이 있고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꼭 챙겨보는 것은 나영석 PD의 ‘삼시세끼’ 프로그램이다. 이서진, 옥택연이 나온 정선1에 이어 차승원, 유해진, 손호준이 나온 어촌편, 다시 5월에 시작한 정선2에는 이서진, 옥택연, 김광규가 나와 하루 세끼를 직접 만들고 있다.
가마솥에 불 때어 밥하는 장면에서는 하우스에 살면 가마솥부터 샀을 거야 했고 감자씨를 심는 장면에서는 ‘아파트 창가에 허브라도 키워야지’ 했다.

미국 ABC 방송은 한국의 먹방, 쿡방 열풍을 ‘이상하다(Strange)’ 며 특이한 문화현상이라고 했지 더 이상은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미국의 마사 스튜어트나 영국의 셰프 제이미 올리버를 중심으로 한 요리 프로그램이나 키친 프로덴셜 같은 드라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요란스레 먹고 요리하는 트렌드는 한국이 심하다고 한다.

한국 시청자들은 왜 이렇게 요리 프로에 열광하는지, 또 미주한인들은 왜 이 프로들을 즐겨보는 것일까.첫째는 한국이 밥 먹고 살만하다는 것이다. 6.25 동란 후 밥 대신 물로 배 채우던 시절을 지나 파독 광부와 간호사, 월남 파병, 경제개발5개년 계획, 88올림픽, 부동산 폭등 등을 치르면서 나라가 부강해지고 중산층이 늘어났다. ‘하얀 쌀밥에 고깃국’ 시대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가 먼저가 되었다.

둘째는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이 주로 해온 요리가 남녀 공동분담이 된 면도 있다. 원래 음식은 본인이 직접 하는 것보다 남이 해주는 음식이 더 맛있으니 남자가 요리하는 프로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점도 있다.

그나저나 미주한인 여성에게는 여전히 요리가 ‘일’이다. 종일 가게에 나가 부부가 함께 일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부엌일은 여성의 차지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훈남 셰프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요즘 드라마보다 쿡방 프로그램이 더 재미있다는 말이 나온다.

또한 어차피 전세계적인 불경기 시대에 미국에 오래 살아봤자 넓은 집에 좋은 차, 모든 물질적 부를 일구기는 힘들 것 같다고들 한다. 그저 소박하게, 큰 돈 들이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요리하여 밥을 같이 먹는 일상의 행복을 찾자는 심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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