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1년만의 한국 방문

2015-05-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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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수필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1년만의 고국 방문은 정말 생각할수록 아득하기만 하다. 2003년과 2004년에 재미한국학교 협의회(NAKS)에서 주관한 금강산, 백두산 방문에 이어 이번이 11년만의 방문 이었다. 오빠 기일 핑계로 겸사겸사 방문한 것인데, 보잘 것 없는 나를 얼마나 반겨주던지 정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식구들, 친구들, 선생님들(동료들), 친척들, 그리고 제자들 까지도…

먹거리기로 유명한 고국에서의 점심약속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의 매일 계속 되었다. 고향 광주에서의 일정은 정말 화려한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못 주어서 가슴 아플 정도로, 살이라도 깎아주려는 광주의 새언니, 봄이면 어렸을 때 김부각을 평상에다 늘 해먹던 그 맛을 그리워하여 부각을 맞추어 놓고 기다리던 그녀를 보면서 옛날의 어머니 생각에 눈물 흘렸던 나였다.


서울의 언니와 질녀는 어떻게 나를 확 바꾸려는 것인지, 백화점이나 시장에 들러서 이 옷 저 옷 만져보며 입혀 보던 그녀들. 고향 광주와 서울이 그동안 얼마나 변했던지, 질녀의 차를 타고 경기도 파주시 해이리 일일코스 구경, 일산의 한옥마을, 경기도 가평의 생명의 빛’예수 마을(예배당) 을 구경했을 때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그 오지 마을에 그렇게 큰 성전을 건축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어느 권사님의 정성 어린 기도와 그 성전을 건축한 건축가의 기도로 성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들을 내 가족처럼 품어준 이유로 나를 친어머니처럼 여긴다는 조카들의 정성이 나를 또 감동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만남들 가운데서도 잊지 못할 만남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여상고 졸업생(제자들)들과의 만남이었다. ‘팔성회’라는 여덟 성을 가진 선생님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중 돌아가신 분, 타지로 가신 분을 제외하고 모이는 수가 몇 명 되지 않아 모임이 시들해 지고 있었다. 내가 온 기념으로 다시 모임을 갖게 되었고, 졸업생 몇 명만 참석 할 거라고 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뜻밖에 선생님 5명, 졸업생 8명의 자리가 만들어졌고, 사회자의 사회로 큰 모임이 되어 버렸다.
그 당시 충분히 전남여고에 갈 수 있는 실력을 가졌으나, 가정형편상 광주여상고를 지원했던 학생들이다. 이제는 그들이 회갑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모두들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고 생활기반을 튼튼하게 다지고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날 저녁 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나는 과연 저들 앞에 떳떳한 선생님으로 섰었던가,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저들에게 저들 자신의 마음의 문으로 잘 인도하였던가, 내 자신의 지혜를 강요하지는 않았는가...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미국에서 일상으로 돌아와 곰곰이 고국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본다. 한국은 퍽이나 역동적이고 생동적인 큰 장점을 지녔으나 성공주의, 성과주의, 물질주의에 단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고국 방문에서의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은 몇 년 전 수필집을 출판했던 시문학사에 들러서 두 번째 수필집을 출판하기로 결정한 일이다.

앞으로 곧 출판될 나의 두 번째 수필집인‘어리석은 교사’는 교단 수상집으로 태어날 것인데 과연 어떤 모습의 아이일까 궁금하기만 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 세상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교사’로 한눈팔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온 책임을 다 한 느낌이다.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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