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왕의 여인

2015-05-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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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진<조각가>

당나라 현종에게는 양귀비, 조선 숙종에게는 장희빈이 그리고 프랑스 루이 15세에게는 ‘마담 퐁파두르’ 가 있었다. 세기에 손꼽히는 왕의 여인으로 왕의 집권 황금기를 함께 했던 그녀들은 각각의 이름 보단 ‘왕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통용되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와 불같은 사랑을 한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하는 미인으로 프랑스 루이 15세의 ‘마담 퐁파두르’. 퐁파두르 본명은 ‘잔 푸아송’ 이었으며 파리의 은행가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 문학 등 개인교습을 받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하였다. 그녀의 외모와 교양은 루이 15세 눈에 띄어 1845년, 마침내 스물넷의 나이로 그의 정식 애인이 되었다, 왕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퐁파투르 후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부인과 대립 할 수밖에 없는 왕비의 측근조차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하나”라고 할 만큼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러한 그녀의 외모보다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씨와 교양, 사고의 깊이가 왕의 총애를 받는 요인이었다.

루이 15세에게 정식으로 공인된 정부로 24세에 베르사이유 궁에 입상한 마담 퐁파두르는 20년 동안 권세를 누렸다. 베르사이유 궁에 들어온 그녀는 라이벌 격인 왕비 마리아를 정성껏 모시고 비위를 맞추어 왕비의 신임도 얻었다. 그러자 루이 15세는 국정을 그녀에게 맡겨 15년간 실제로 프랑스를 통치했던 왕의 여인이다.
왕의 깊은 관심을 받을 만큼 그녀는 정치적 안목과 교양을 겸비한 세기 최고의 여성으로 손꼽힌다. 정치, 외교적으로 최고의 실력을 갖춘 그녀는 미술, 음악,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화려하면서도 지적인 외모와 함께 패션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뉴욕 Frick collection 의 초상화 작품에 의하면 그녀의 패션 스타일과 꽃무늬 패턴은 로코코 미술로 고정화되어 17세기 프랑스 문화의 기반을 마련케 하였다.
그녀의 행동은 모든 사회의 표준이 되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여인의 위세를 시각적으로 증명케 하는 천장에 다다를 법한 높은 머리 장식을 단숨에 단아하고 기품 있게 뒤로 빗어 넘긴 묶음 스타일로 안정시켰다.

귀부인들의 화려함과 표현적인 미적 욕심보단 인문학적인 전파, 즉, 보수적인 정치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백과사전의 사용이 금지 되었을 당시 그녀의 적극 지지로 프랑스 백과사전의 판매가 다시 허용되게 되는, 그러한 인문, 문학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녀는 평생 왕의 정부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프랑스 정치, 외교적 통치자임에 분명하다.

당시 베르사이유 궁 안에 ‘왕립 세브레 도자기 제작소’를 만들어 프랑스의 도자기 역사가 시작되도록 하였고 유럽의 세라믹 도자기를 생산케 한 것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안목을 엿보게 한다. 또한 ‘부쉐’ , ‘샤르뎅’, ‘피갈’ 등의 저명한 작가를 후원하여 프랑스 미술의 황금기를 꽃피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녀의 초상화에는 늘 책, 악보, 지구본 등 학문적인 열정이 보인다, 그녀의 손길이 깃든 책들은 ‘마담 드 퐁파두르 콜렉션’이라 불리며 고가에 거래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Book collection 로 남아있다. 이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느끼고 싶다면 뉴욕 E 70th st Frick collection 에 가서 마담 퐁파두루의 초상화를 만날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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