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 눈 녹듯 하다

2015-05-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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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예리/교무/리치필드 팍 거주)

유난히 눈도 많고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 오는가 싶더니 춘분이 되어서도 다시 한 번 폭설로 깜찍한 앙탈을 한 번 더 부리고서야 조금 더 봄에 밀리는 겨울을 본다.

어제는 눈이 많이 온다기에 은근히 걱정을 좀 했다. 코너이면서 주차장이 넓은 집에 사는 관계로 눈만 오면 길의 눈 치우느라 이번 겨울 고생을 좀 한 터였던 거다. 다행으로 생각보다 많은 눈은 아니라 길만 한 번 밀고 주차장 눈은 따뜻한 기운에 절로 녹아 손 댈 일이 없었다.


‘봄 눈 녹듯 하다.’라는 속담을 아시는지? 봄에 내린 눈은 쉽게 녹는다는 뜻으로 사물의 형상이나 기분이 쉽게 사그라지는 것을 일컫는 속담이다. 봄이 되면 겨우내 쌓였던 눈도 녹아내리고, 내리는 눈은 즉시 녹아 없어진다. 그래서 무엇이 속히 사라져버리는 것을 “봄 눈 녹듯 하다.”라고 한다. 또 마음의 원망이나 응어리, 오해 근심과 걱정 등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물의 형상이나 기분이 쉽게 사라지거나 풀리거나 사그라지려면 그에 마땅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겨우내 쌓인 눈이 녹으려면 천지의 따뜻한 기운이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인 것처럼 우리들 마음에 쌓인 원망이나 응어리를 사라지게 하는 조건도 분명 있다는 것이다.

친구와의 도란도란 대화, 부모님의 따뜻한 칭찬 한 마디, 말없는 미소, 누군가 잡아주는 따뜻한 손, 경전에서 본 성현의 글귀 한 구절, 노래나 음악, 차 한 잔, 국밥 한 그릇, 아이의 해맑은 웃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위로, 그리고 마음에 언 눈 녹이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마음의 힘을 얻는 것 등 시절 인연에 따라 수많은 것들이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천지의 기운이나 상대가 베풀어주는 무상보시의 은혜로 언 눈을 녹이는 것은 그 능력이나 권한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타력에 힘입어야 하는 일이라 자신이 이러고저러고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평소 스스로 길러 둔 정신의 자주력, 육신의 자활력, 물질의 자립력 등의 자력은 누가 뺏어갈 수도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내 능력이요 권한이다. 따라서 자력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눈을 녹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우리 교당 처마 끝에는 지붕의 눈이 녹느라 우두두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대숲에는 새들의 지저귐이 바쁜 주말의 오후이다. 마치 봄 눈 녹듯 우리네 가지가지 근심과 걱정도 자력과 타력의 힘을 입어 말끔히 녹아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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