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려와 공존

2015-05-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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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능력으로 6일간 이루어진 천지창조는 최초로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고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기원은 맨 마지막에 아담에 이어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빚은 것이 시초이다.

또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고대 이교도들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인간을 만든 기록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누군가가 땅을 정리하고 배열해서 산과 숲, 논밭 등을 배치하고 물고기는 바다에, 새는 공중에, 네 발 달린 짐승은 육지에, 그리고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땅에서 떼어낸 흙을 물로 반죽하여 신의 형상과 비슷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배경이야 어떻든 확실한 것은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났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은 계속 이어지면서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장소와 시각은 모두 틀리지만 동일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구나 같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에 의한 노예해방 선언으로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흑인은 보이지 않게 백인들로부터 무시와 차별을 당하며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 볼티모어에서 흑인이 백인의 과잉 진압으로 심각한 척추부상을 입고 체포된 지 일주일 만에 숨진 사건이 그 한 예다.

지구촌 곳곳에는 먹고 사는 것조차 힘이 들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는 빈자(貧者)들이 많다. 최근 리비아와 소말리아, 방글라데시 등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먹고 살길을 찾아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며 죽음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와 달리 부자들은 남아도는 돈을 주체할 길이 없어 어디 보고 즐길 거리가 없나 하고 찾아다니기에 분주하다. 지난 주말 세계 복싱계의 전설로 불리는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필리핀의 팍키아오의 경기를 보기 위해 부자들은 일인당 많게는 수십 만 달러(암표)에 달하는 입장료를 내고 치고 맞고 하면서 피 터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모여들었다.

같은 인간임에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형태가 이처럼 극적으로 다른 것은 아이러니다.고대의 인간은 자연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미약한 존재였다. 이제는 두뇌의 계발로 놀라울 정도의 첨단 과학문명과 부의 세계를 진작시켰다.

하지만 세계인이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세계는 하나’라고 부르짖는 것이 일상화 되었지만 여전히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당장 우리 앞에는 99%의 없는 자가 1%의 가진 자의 횡포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가진 자 힘 있는 자는 과거 미약했던 인간본연의 모습을 돌아보며 빈자들의 굶주림과 힘없는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극심한 경쟁으로 빈부의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고 강자의 횡포, 약자에 대한 차별행위는 줄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원한의 총기사고, 흑인폭동, 극단적 테러사건은 멈추지 않고 있다. 있는 자, 힘 있는 자들의 배려와 공존 노력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스위스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칼 힐티는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죽음으로 가는 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가진 자들의 끝없는 욕심에도 일침을 가하는 명구로 가슴에 와 닿는다. 약자를 배려하며 살다 갈 것인가, 자신의 욕망만 채우다 갈 것인가.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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