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

2015-05-0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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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어린이는 얼마나 멋진 피조물인가! 그들은 말과 같은 식욕을 가졌고 칼을 삼키는 마술사의 소화력을 가졌다. 소형 원자탄의 정력과 고양이의 호기심을 가졌다. 그들은 시인이며 천사이며 예술가이다. 그들은 새들과 얘기하고 별나라에 왕래하며 꽃과 사귀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춘다.

어린이는 제비꽃의 부끄러움을 간직했는가 하면 사냥개의 담대함과 분화구의 열정도 가졌다. 당신이 그들을 골방으로 내쫓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심장으로부터 추방할 수는 없다.


실상 아이들은 그대를 붙잡고 있는 포수이며 그대를 지키고 있는 간수이며 그대에게 일을 주는 보스이고 그대의 주인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어른의 웃음소리보다 더 평화스럽고 그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어른의 노래보다 더 아름답다. 아이들이 떠들 때 신경질이 나는가? 그러지 말라. 그대가 정말 걱정할 때는 아이가 떠들 때가 아니라 조용할 때이고, 아이가 울 때가 아니라 울지 않을 때이다.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묻는다고 귀찮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모가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질문만을 하는 아이가 있다면 비정상적이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기관총처럼 물어올 때 그대는 기뻐해야 한다. 그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거의 모든 부모는 그 아기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상적이기를 기원한다. 즉 평균 수준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부모의 욕심은 정상과 평균의 인간에 만족하지를 않는다. 아기가 태어났던 그 순간의 기도와 감사를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는 부모만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진짜 어버이의 자격이 있다.

정신의학자 다이어 박사(Wayne Dyer)는 어린이의 고민이나 질환의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부모의 욕심스런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과잉열성이 한 생명의 가치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사랑은 기대가 아니고 협조이다.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도록 돕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심리학자 엘킨드 박사(David Elkind)의 명저 ‘떠밀리는 아이: 그들은 너무 빨리 너무 일찍 자라고 있다.’(The Hurried Child: Growing up too fast too soon)에서 부모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오늘의 어린이들은 부모와 성인 사회로부터 너무 재촉을 받는 것이 최대의 스트레스가 되어 있다. 현대의 어린이들은 겉으로 성숙하게 보이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속은 여전히 어린아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아이들에게 너무 많이 기대한다. 그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결정과 환경에의 적응을 강요하고 있다. 학습 면에서 압력을 가하고 일찍 배우고 빨리 성공하도록 떠밀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실패에의 두려움에 늘 눌려있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자. 그들은 부모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체들이기 때문이다.

5월 5일은 어린이날, 교회에서 5월 첫 일요일을 어린이주일로 지킨다. ‘어린이’라는 말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든 말로서 ‘어리신 분’이라는 존대어이다. 아이를 이렇게 높여 부르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 한 나라뿐이다.

시인 타고르는 “모든 어린이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품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어린이는 인류의 소망, 남녀의 사랑으로 이룩되는 오직 하나의 진실, 너와 나의 계승자, 미래를 향한 신의 계획, 우리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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