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앵그리 맘’

2015-05-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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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뉴욕에서 워싱턴 D.C. 가는 길에 볼티모어를 지나게 되는데 그곳에 다다르면 늘 생각나는 것이 스팀 크랩이다. 빨간 껍데기를 벗겨내면 뽀얀 게살이 쏘옥 나오며 달콤한 육즙에 두툼한 살이 제대로 먹는 것 같다.

20대인 작은 딸은 유모차에 타 있던 어린 아기시절에도 새하얀 게살을 발라주면 날름날름 잘도 먹었다. 이렇게 워싱턴 DC에 갈 때면 게살 먹는 즐거움을 주던 볼티모어가 요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지난 12일 흑인청년 프레디 그레이가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척추 부상을 입고 19일 사망했다. 장례식후 경찰 폭력에 항의하면서 사법 정의를 외치던 시위대는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돌멩이를 들더니 드디어는 경찰차를 부수고 불을 지르고 상가 약탈을 거리낌 없이 하는 폭도로 변하며 흑인인종차별 시위란 명분이 사라지고 있다.

작년에 대규모 폭동이 벌어진 미주리주 퍼거슨시를 비롯 뉴욕, 시카고, 보스턴, 시애틀에서 동조시위가 일어나고 2일에는 다시 볼티모어에서 사법 정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어 있다 한다.

미국사회 최대 현안인 인종차별이란 민감한 이슈는 접근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럽다.
경찰 과잉대응으로 흑인청년이 숨진 것이 시위의 발단이지만 메릴랜드주 최고 공업도시였던 볼티모어의 해운·철도운수 산업이 몰락하면서 실업율과 빈민층이 늘어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레이가 살았던 볼티모어 서부 샌드타운 지역은 백인이 다수인 경찰과 빈곤층 흑인들간의 오래된 갈등이 내재되어 있고 주민의 절반이 무직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곳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본다는 점이다. 특히 폭동이 격렬했던 볼티모어 서부 먼다우민 샤핑몰 인근의 40여개 한인상점이 피해를 보고 부상당한 한인도 있다. 미주한인들은 1992년 4.29 LA 폭동 재연을 우려하고 있다.
볼티모어 뉴스를 보다가 한 흑인 엄마가 시위에 참가한 아들을 야단치고 마구 때리며 기어코 끌고 가는 ‘앵그리 맘’ (Angry Mom)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노란색 상의를 입은 엄마가 일부러 갖춰 입은 듯 검은 색 옷에 검은 배낭을 매고 검정 마스크까지 쓴 10대 아들의 등과 머리를 손으로 후려치는 이 장면은 볼티모어 지역방송 카메라에 잡혀 미 유수 방송에 퍼지며 화제가 되었다.

토야 그레이엄이라는 이 흑인 엄마는 28일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내 아들이 또 하나의 프레디 그레이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 엄마가 “그 망할 놈의 마스크 좀 벗어”하고 야단친 심정이 이해된다.

어려서부터 볼티모어 게살을 잘 먹던 작은 아이는 지난 2014년 12월, 경찰 체포 중 숨진 흑인 에릭 가너 사건 ‘정의 없이 평화 없다’는 시위에 참여했다.

“같이 행진한 사람 중에 동양인도 많고 백인도 많아. 공정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 용기 있고 의로운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정의가 실현될 거야.” “브루클린 다리 와이어 위로 올라가려는 흑인청소년들을 경찰이 말렸다면서, 공무집행 방해가 계속되면 우발적으로 총이 나가는 거야. 학생인 너는 공부를 마친 후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지녔을 때 더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니?” 평소 국제앰네스티 활동에 관심 많은 아이는 다음 번 시위에 가지 않았다.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평화적 시위로, 말콤 X는 강력한 폭력 시위로, 각자 다른 방법으로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마틴은 다른 사람들이 ‘미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사랑’을, 세상이 ‘차별’을 말할 때 ‘공존과 평화’를 외쳤다. 볼티모어 ‘앵그리 맘’ 동영상을 보면서 부모로서 책임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회정의도 부르짖어야 하고, 내 아이도 챙겨야 하고, 참으로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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