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의의 외침

2015-04-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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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신생국가 미국이 아침의 돋는 해와 같이 발전하여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답사해서 유럽의 늙어 가는 나라를 계몽하고자 프랑스의 대 철학자 토케빌레(Alexis De Tocqueville)가 100년 전에 아메리카를 방문하였다.

그는 우선 미국의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땅과 거의 무진장의 어장을 거느리는 신대륙을 관찰하였고, 아직 적은 인구였으나 세계 어느 민족보다 부지런히 일하는 성실성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그의 보고서의 결론은 자원과 노동력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고 그가 방문한 교회들로부터 받은 인상으로서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교회들은 대부분의 설교자가 선(Goodness) 과 정의(Righteousness)를 주제로 외치고 있었음을 본 그는 이렇게 썼다. “미국의 설교강단은 정의의 불꽃이었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철학자가 말하는 것은 위대함이란 풍부한 지하자원, 풍요한 바다와 숲, 과학기술의 발달과 군사력의 강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도자와 국민이 정의를 외칠 줄 알아야 강한 나라 좋은 나라가 된다.


4.19 학생 혁명(1960년)도 어언 55주년이 되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흔히 보는 학생데모가 아니라 전국적인 외침이었다. 같은 해 2월에는 대구에서 대대적인 고등학생 시위가 있었고, 3월에는 마산에서 큰 시위가 터졌으며, 드디어 4월18일 서울에서 고려대 학생이 선봉에 선 시위가 모든 대학과 시민을 일으키게 하였다.

시위의 단서는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이 개표를 조작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실각하고, 부통령 이기붕 일가가 동반 자살하였으며,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자가 185명, 부상자 1,500여명을 내고 결국 제1공화국이 문을 닫게 된다.

토인비는 “문명의 흥망사(興亡史)는 지도자들의 용기가 좌우했다.”고 단언하였다. 정의로운 친구를 한 명 갖는 것은 부자 친구 열 명을 갖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전자는 나를 명예롭게 할 것이고, 후자는 나를 부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뜻하는 두 낱말이 있다. Justice는 정확하고 엄격한 의무를 요구하는 정의이고, Righteousness는 복지와 친절과 관용을 내포하는 정의이다. 예수의 의는 후자에 속하고 바리새인의 의는 전자에 속한다.

역사상에 있었던 수많은 혁명과 개혁이 정의에 대한 외침에서 비롯되었음을 안다. 처참한 영국의 교도소를 보고 존 하워드(John Howard)가 일어나 정의를 외친 것이 교도소 개혁운동이 되었고, 노예의 슬픔을 보고 윌리엄 개리슨(William Garrison)이 “노예의 슬픈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늘지게 한다”하고 외치며 나선 것이 노예해방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플로렌드 나이팅게일 하면 등잔을 든 백의의 천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둘도 없는 고집통이고 몹시 성미가 급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환자에 대한 잘못된 처리에 분개할 때 신의 음성을 듣고 정의의 사신이 된 것이다.

한국의 3.1 만세운동, 4.19 학생혁명은 무엇인가. 정의를 구현하려는 신념을 폭발시킨 외침이었다.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였을 때 크레머 목사(Henry Kramer)가 시무하던 교회 사람들이 밤중에 찾아왔다. “목사님, 이런 때 기독교인들이 무엇이 해야 옳습니까?” 목사가 물었다. “예수님이라면 불의를 보고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물론 화를 내셨겠지요.“ ”그럼 우리도 화를 내야합니다. “ 이렇게 해서 목사관에서 유럽의 최강 저항운동이라고 불리게 된 DRA(Dutch Resistant Movement)이라는 지하 저항운동이 목사관에서 조직되어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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