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에 잡은 횃불’

2015-04-13 (월)
크게 작게
연창흠(논설위원)

우리의 고향은 큰 허공이다.비어있는 곳에서 왔다가 비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허공 속에 있으면 절로 편안해 진다. 이것이 비어 있음의 원초적 원리다. 즉, 공(空)이 근원임을 아는 사람은 부자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마음을 비울수록 더 큰 것으로 채워진다. 더 큰 것이란 대체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것일 때가 많다. 단순하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을 쫓아서 이득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인생을 허비할 뿐이다. 자신의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 큰 것만 노려서는 안 된다. 엉뚱한 것을 담으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마음 비움은 삶에서 꼭 거쳐야 하는 큰일이다.


살다보면 길흉이 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판단을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길을 가다가 잠시 물러서야 한다. 그리고 지혜로써 사물의 실상을 비춰봐야 한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비워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향후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비울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마음을 비우면 작은 하나를 얻어도 만족을 느낀다. 지극히 평범한 일에도 감사할 줄 안다. 만족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재산이다. 무형의 가치인 만족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행복하게 한다. 행복과 불행의 선은 자신이 긋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그 선의 경계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죄는 욕심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불행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허물은 허욕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은 항상 넉넉한 것‘이라고. 결국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부족이란 없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불행이 없다는 의미인 게다.

잘 비우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이다.
죽을 때 입는 수위에는 주머니가 없다. 갈 때는 다 비우고 가라는 뜻이다. 태어날 때는 주먹을 꽉 지고 죽을 때는 손은 다 펴고 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하나, 둘 잡기 시작하다 죽을 때가 돼서는 다 주고 가는 것이다. 결국 잘 죽는다는 건 다 내주고, 다 비우고 간다는 얘기다.

말이 쉬워 그렇지, 마음을 비운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다가 마음을 비웠다 싶으면 또 생각을 비우지 못한다. 생각을 비웠다 싶으면 또 마음을 비우지 못한다. 이게 바로 보통 사람이 갖고 있는 자기 한계가 아닐까 싶다. 불가에서는 항상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도 문제가 많다. 지금 한인사회가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을 비우지 못한 탓이 크다.

지금 한인사회는 진흙탕 싸움으로 시끌벅적하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욕심만 부리는 탓이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이렇게 가르친다. ‘승자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있다. 패자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있다’고.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툼만 만들 뿐이다, 어떤 다툼이든지 그 원인은 서로의 욕심에 있음이다. 화합을 원하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아주 작은 불꽃 하나가 큰 산불은 낸다. 그렇듯 작은 욕심의 불씨가 한인사회의 큰 다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불교 경전인 중아함경에서는 욕심을 ‘손에 잡은 횃불, 불구덩이’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욕심은 손에든 횃불과 같아서 바람을 거슬러 가면 손을 불타게 만든다. 몸과 마음도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사람을 끌어들여 몸과 마음을 태우는 불구덩이와 같다는 뜻이다. 결국, 욕심이란 영혼과 정신이 치유될 수 없는 독에 빠지게 하는 것이란 의미인 게다.

욕심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욕심은 채워진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차고 넘치더라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더 큰 욕심만 자라나니 모자라고 부족하다. 더 큰 욕심에 휩싸여 항상 갈증과 초초함만 느끼게 될 뿐이다. 그러니 현재 난리법석인 한인사회도 그 당사자들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평온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