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별, 또 다른 만남

2015-04-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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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폭설 때문이었는지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졌다. 함박눈도 아니고 아주 자그마한 싸리눈이 솔솔 내려 쌓이는 것을 보며 멈추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었고 커피 한잔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저 눈이 오리털처럼 따뜻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고 음악을 틀어 놓고 뭔지 모를 고립감을 즐기기도 했었다.

그날도 영하로 뚝 떨어져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좋은 취지의 모임에 연주를 하러 갔다. 미니 콘서트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연주자들을 섭외해서 닷새 만에 만들어 올리게 된 무대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턱 없이 부족한 준비기간에 당연히 고사했겠지만 그 모임의 특별함 때문에 어려움을 감수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그날 밤은 뉴욕 가정상담소 이벤트였다.

가정이라는 단어는 참 특별하다. 누구에게나 있고 또 있어야 하며 그 어느 곳 보다 보호받고 이해 받고 사랑 받아야 하는 곳. 따뜻한 엄마 품 같이 모든 것을 힐링 받는 곳.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찢기고 깨지고 멍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드러내 놓고 도움 청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정을 돌보는 일은 특별하다.


귀하디귀한 사람에 대한 일, 그것도 상처받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일, 아무래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다수가 여성들이다 보니 2세들에 대한 케어도 빠질 수가 없을 것이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알 같은 상태의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어려울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 할 수조차 없기에 이런 일을 후원하는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행사장을 찾았다.
사랑스러운 작품들이 가득 걸려있는 맨하탄의 어느 아트 갤러리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행사 자체도 요란하지 않았고 잘 정돈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날 음악회는 가정을 생각하며 기획한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연주자와 관객들의 마음이 통하는 잔잔하지만 가슴 벅찬 교감의 시간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어떤 이벤트 보다 많은 분들이 인사 해 주셔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환한 얼굴을 가진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의 겉모습은 달라 보였지만 사려 깊고 포근한 속마음은 똑같은 사람들 같았다. 많이 웃었다. 따뜻한 미소와 가슴 훈훈한 대화 속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는 특별한 달란트가 필요 하겠지만 나눔은 누구라도 열린 마음과 생각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아픈 이웃 돌보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에 기분 좋았고 전화 한통에 흔쾌히 음악회를 빛내준 디 앙상블 동료음악가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던 밤이었다.

이별은 아프고 슬프다. 그래서 이별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고집할 때가 많다. 하지만 즐거운 이별도 있다. 지긋지긋했던 춥고 긴 겨울과의 이별 말이다. 이제 꽃피는 봄과 만나는 설레임의 계절이 왔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의 닫힌 마음, 무심함, 작은 기부에 대한 부끄러움, 어려울 것이라는 착각 등등의 추위와 과감히 이별하고 마음과 관심과 물질과 사랑을 나누는 따뜻한 만남을 기대해 보는 건 어떨까?

배경미(오보이스트, 릿지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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