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결혼 기념일

2015-04-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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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병원근무/티넥>

아주 오래전, 가슴 두근거리면서 맞이한 결혼 1년 되던 날 나는 맨하탄 라커펠러 센터의 60층 이상의 건물 스카이라운지에 초대되었다. ‘결혼기념일에는 와인 잔을 홀짝거리며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기에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라는 조언을 듣고 남편이 예약을 해 놓은 것이다.

그런 장소에 나도 한 번 못 가볼쏘냐, 큰 맘 먹고 거금을 투자하여 내게 그런 곳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던 듯하다. 결혼기념일에는 당연히 가는 곳. 그런 은은하고 분위기 나는 곳에서 로맨틱하게 둥근 탁자에 촛불 하나 켜놓고 벽 전체가 두터운 유리로 된 저 밑 아래로 흐르는 차량들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입술 끝에 와인 맛을 음미하는 시간.


그날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지하철역을 잘못 내려 둘째 발가락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쳐 대는데 대책 없이 찔뚝거리면서 오랜만에 꺼내 신은 하이힐을 벗어들지도 못하고 출입구를 찾아 헤매던 일이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레인보우 룸이라고 했던가, 허덕허덕 그 곳에 찾아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는 그 분위기에 맞추려고 후까시를 잔뜩 넣어 빗어 올린 머리가 땀에 젖어 떡같이 서로 들러붙어 하나같이 키 크고 멋진 미국사람들 틈 속에서 주눅 들어 황망했던 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 기억도, 포크와 나이프를 휘둘렀던 기억도, 입술 끝에 와인 맛을 음미했던 기억도 없다.

황당하고 아팠던 발가락의 기억만 남았던 그날 이후 해마다 찾아오는 결혼기념일, 고백컨대 잊어버리고 지나간 때도 있었고, 생각해보니 된장찌개와 찬밥으로 적당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TV 앞에서 한참 졸다가 생각났을 때도 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특히 태양이 나를 향해 빛나는 것도 아니고 온종일 두 손 놓고 앉아 여왕님같이 시중 받을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눈뜨고 일어나 매일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끝장에는 헛물을 켜는 것으로 끝나지만 은근히 보골 보골 어떤 물질적인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는 평소와는 어쩐지 다른 기분의 하루를 살지 않았던가. 그것도 오래 전 이야기다. 그래도 그런 때가 좋았었던 것 같은 것은 기대감이라는 것에도 엔돌핀이 들어있다는 어느 전문가의 발표 덕일까.

얼마 전,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어디 가서 저녁 먹을까” 남편이 그래도 잊지 않았다고 생색을 낸다. 그때 그 장소, 레인보우라는 곳은 아직도 영업을 하는지... 발가락에 문제가 없더라도 또 그런 곳에 가서 분위기 어쩌구 하며 저녁 먹을 마음은 없다.

“정말 그렇군, 40년인가 39년인가,..” “샤부샤부나 먹으러 갑시다” 구태여 와인 잔을 들고 신통치 않은 이로 스테이크를 씹어야만 기념되어지는 날은 아니지 않는가. 집 근처의 포오식당을 향해 가볍게 집을 나선다. 분위기에 맞는 헤어스타일도 없고 운동화에 편한 추리닝을 걸치고 찾아 들어간 식당에서는 후루룩 후루룩 하얀 티스푼으로 국물을 떠 마시며 대화를 나누려 해도 마땅히 할 말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앞쪽 맞은편에 40초반의 아는 부부가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그쪽도 서로 말없이 후룩 후루룩 국수만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을 보니 꼭 우리가 늙고 문제가 있어서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입술 끝에 와인대신 입천장을 데는 뜨거운 국 국물에 후후거리며 새삼 함께 살아온 날들이 소중하게 가슴을 적신다. 그래도 오래전 결혼기념일에는 라커펠러 센터 맨 위층에 자리 잡은 레인보우 룸을 찾던 멋진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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