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에서의 부활

2015-04-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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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 논설위원>

지난 주말 오랜만에 지인들과 함께 산행을 했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의 끝자락에 또 그날도 눈이 내렸다. 정말 길고 긴 겨울이다. 3월의 마지막이라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나야 하는데 초봄에 눈이 내리니 뉴욕의 겨울이 이렇게 지루하게 긴 것은 처음이다. 기록에 의하면 81년만에 있는 긴 겨울이라 한다. 이제는 눈이 안 오겠지.

9명의 동료들은 눈을 맞으며 미끄러운 산길을 올라갔다. 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목에서다. 한 사람이 먼저 내려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커뮤니케이션이 잘못 전달 돼 노란색 싸인으로 가다 까만색 싸인으로 바꾸어 길을 타야 하는데 그것이 미처 전달되지 않았다. 8명은 까만 싸인이 있는 곳에서 그에게 연락했다.


그가 그대로 가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셀폰이 터져도 잘 들리지를 않는다. 그래서 8명은 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소식이 없다. 눈은 펑펑 내리고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를 찾기 위해 남은 일행들은 그를 찾아가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됐다.
그래도 그를 찾지 못하면 911에 신고하여 헬기를 동원해야 할 그런 처지가 돼 버렸다. 다행히도 그는 셀폰연락을 할 때 무언가 잘못돼가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며 하는 말이 온 산을 헤매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왔다며 자신도 부활한 기분이라 저녁을 모두 쏘겠다고 하여 저녁을 진수성찬으로 먹을 수 있었다.

초봄이라 아이젠을 미처 준비하지 않고 산행에 올랐던 일행들은 눈 속의 미끄러운 비탈길을 다행히도 아무 사고 없이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면 철길이 나온다. 철길에서 산행을 기념하여 셀폰으로 사진을 찍게 됐다. 한 사람이 찍고 또 다른 사람이 바꾸어 찍을 때였다. 철길에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기차다’ 소리쳤다.

사진 찍느라 철길위에 앉아 있던 일행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흩어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다가왔다. 사진을 찍던 곳은 철길의 코너였기에 미처 기차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기차가 지나가 버리자 일행들은 모두 한 숨을 내쉬었다. 잘못했다간 그 다음날 뉴스에 큰 기사가 날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저절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한 명이라도 철길에 발이 채[여 넘어졌다면 그냥 기차에 깔릴 수밖에 없는 그런 급박한 상황이었으니 그렇다. 기차가 다가온 건 불과 4-5초 사이였다. 조심했어야 했다. 우리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기분들이 되었다.

부활절을 앞두고 우리 일행도 부활의 진한 감동을 맛본 것이다.
부활이란 의미 안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뜻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즉 삶 속의 부활이란 뜻도 담겨 있다. 우리네 생은 죽음 같은 삶을 살아갈 때도 많다. 경제적으로 인한 죽음, 병적인 죽음, 정신적으로 인한 죽음 등등 수많은 죽음 같은 상황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오뚝이처럼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활의 생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죽음과 사망을 넘어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도 죽음 같은 세상의 어둠속에서 활기를 찾아 살아갈 때 그 생은 부활의 빛을 보게 되는 거다. 매순간 부활을 맛보며 감사하게 사는 삶이 곧 부활의 삶이다.

산에서 잘못된 길을 가다 다시 돌아온 한 명. 연락이 두절되면 산 속을 헤매다 동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부활한 셈이다. 철길에 앉아 사진을 찍다 느닷없이 달려든 기차를 피해 살아난 동료들. 부활의 감동을 맛보았다. 부활. 죽음을 넘어선 기독교의 핵심사상이다. 그러나 삶속에서의 부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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