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쓰라-태프트 망령

2015-03-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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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

미국은 1899년에서 1902년까지 스페인 영토였던 필리핀에서 전쟁을 치루고 미국이 승리해 필리핀을 통치하게 됐다. 당시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을 삼키기 위해 온갖 정치력을 동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필리핀을 통치하는 미국에 필리핀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 대한반도의 점령을 묵인해 줄 것을 바랐다.

1905년 7월29일 미 육군 장관 태프트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가 도쿄에서 밀약을 주고받았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식민통치를 인정하고 대신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는 통치를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됐고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게 강탈당했다.

이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우리는 지금 미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미국 시민으로 미국의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한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협조해야 함이 미국 시민권자의 의무다. 그러나 현재 돌아가고 있는 국제정세는 미국과 일본이 1905년도에 맺었던 밀약을 다시 연상케 하는 것 같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오는 4월29일은 일본 아베총리의 미 국회의사당 상·하의원 합동연설이 계획돼 있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한 다음날 루스벨트대통령이 치욕의 날을 선포한 단상에서다. 이렇듯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돌이킬 방법은 없을까. 그동안 대한민국은 무얼 했는가. 외교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투명하다. 한심할 정도의 대한외교이다.


일본은 아베의 의사당 연설을 획득하기 위해 미주의 일본기업들이 앞장서 돈을 내고 로비했고 일본정부는 정부대로 총력을 다해 미·일의 밀월을 추진해 왔다. 오바마대통령의 일본국빈방문에 이어 대통령부인이 다시 일본을 찾았고 그 사이 일본 로비스트들은 미 의원들을 찾아 그들에게 얼마나 살살거렸을까. 안 봐도 훤하다.

올해는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한반도는 해방됐으나 북엔 공산당 김일성정권이 들어선지 70년이 됐다. 남은 이승만정권이 들어서 민주자유진영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나 남과 북은 강대국에 의해 두 동간 난체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으르렁되고 있으니 이 또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의 미국 국빈방문에 맞추어 일본은 얼토 당토한 홍보를 전 세계에 퍼트리고 있다. 일본이 있어서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에 발전과 부흥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일본이 일으킨 잔혹한 전쟁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없고 오히려 일본 때문에 아시아가 더 발전했다는 거다.

일본이 미국 빽을 믿고 까불어도 너무 까불어댄다. 미국이 ‘옹야 옹야’해 주니까 세상이 다 일본 세상인줄 아는가 보다. 참으로 반성할 줄 모르는 섬나라 일본 사람의 근성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간 또 다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모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소 잃기 전에 외양간 단속하는 한반도가 되야겠다.

물론 과거에만 매달려서도 안 된다. 과거는 과거대로 직시하고 현재와 미래를 봐야 한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이 일본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나 대한반도를 왕따 시켜서도 손해다. 중국이 중심이 되어 창설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영국이 참여했고 한국도 참여를 결정했다. 미국이 어찌 나올까.

넬슨 리포트 발행자 크리스 넬슨은 한·일 과거사 갈등에 대한 미국의 시각과 해법에서 미국이 과거에는 한·일 관계에 중재 할 수도, 중재해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한·일관계에 적극 중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과 미국은 혈맹의 나라다. 그러나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망령이 또다시 떠올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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