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라지는 것들

2015-03-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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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소셜 미디어에 올린 동영상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IS 요원들이 이라크 북부 모슬 소재 니네바 박물관의 고대 석상을 넘어뜨려 훼손시키고 야외에 있는 거대한 석상을 전동 드릴로 파괴하는 장면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포탄 속에 세계적 유산이 덧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미 중동, 북아프리카를 뒤흔든 내전과 소요사태가 인류 최초의 문명지인 메소포타미아의 수천년 유적을 파괴하고 있고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 되면서 수천년 된 시리아 유적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리비아 내전은 북아프리카 최고의 로마 유적을 위협하고 있다.


1944년 2월 15일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 연합군은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공중포격을 퍼부었다. 바티칸의 추기경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은 1,000년간 정신과 영혼을 지킨 성스러운 곳을 함부로 파괴하는 야만인들이라고 강력비난 했다.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고자 연합군은 전쟁 중 문화유산 보호를 전담하는 특수부대를 결성하고 이들을 ‘모뉴먼츠맨( The Monuments Men)이라 지칭했다.

각국의 박물관 관장, 큐레이터, 건축가 등 350여 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중요한 건축물의 피해를 최소화 하며 나치가 약탈한 예술작품의 행방을 찾았다. 모뉴먼츠맨들은 제2차세계대전의 영웅이 되었다.

한국의 근대 100년 역사 현장에 주로 등장했던 덕수궁도 1950년 9월 25일, 불바다가 될 뻔 했다. 제임스 해밀턴 미군 중위는 무전병으로부터 덕수궁에 수백 명의 북한군이 집결해 있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궁에 포를 떨어뜨리면 수백 명의 적군을 한순간에 섬멸시킬 수 있었다. 시기를 놓쳐 공격을 받게 되면 아군의 사상자가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격 개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결국 북한군이 덕수궁을 모두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을 감행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조선의 왕궁은 이렇게 한 미군 중위의 현명함으로 인해 보호되었다.

IS는 이슬람 율법 해석을 명분 삼아 ‘우상을 보호하는 ‘ 유적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괴와 약탈, 잔혹한 행위로 국제적 관심을 끌어 IS의 존재감과 극단적 이슬람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고도의 전술일 뿐이다.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 이들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유네스코를 비롯 고고학자들이 인류의 유산을 보호하고 테러단체 자금 공급원으로 문화재의 불법 유출을 막는 싸움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반면, 문화유산의 보다 효율적인 보존을 위해 사라지는 것도 있다. 맨하탄 컬럼비아대 가까이 있는 뉴욕한인교회는 1927년부터 수십 년간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안전 문제로 인해 곧 헐리고 4,5월경 새 빌딩 공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건물 원형은 정면 벽 정도로 남는다고. 교회는 오래전부터 길 건너 빌딩의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

수년전 취재를 위해 지하 1층, 지상 4층의 교회 내부를 샅샅이 돌아본 적이 있다. 서재필, 조병옥, 이승만 등 초창기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3~4층의 숙소에 장기투숙하며 독립에 힘썼고 뉴욕한인들은 막노동 품삯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건넸다. 지하실에는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완성할 때 사용했던 피아노도 있었다.

한국정부와 교회 측은 완공된 새 건물 1층에 독립운동 관련 물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옛 건물을 보존하면서 안전대책을 강구할 수는 없는지. 옛사람의 숨결과 손길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삐걱거리는 계단은 그대로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무게를 보여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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