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수는 울었다

2015-03-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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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까지의 40일간을 뜻하는 기독교의 명절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묵상하고 찬양하는 계절이며 ‘회개와 눈물의 계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라는 옛 성전 터가 있으며 사순절에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그 벽에 손을 얹고 회개의 눈물을 뿌린다.

“예수는 울었다.”(요한복음 11:35)라는 성구가 성경의 가장 짧은 구절이다. 영문은 Jesus wept 로서 두 자뿐이다. 예수가 웃었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예수는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흐느껴 울었고, 언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 타락상과 장차 받을 징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어의 ‘울다’와 ‘울림’이 같은 어간(語幹)을 가진 것은 우리 조상의 슬기를 엿보인다. 초상집에서 곡을 하는 풍습도 고인에 대한 애도(哀悼) 보다는 유족과 문상객들이 슬픔을 나누는 울림의 메아리이다. 명 설교가 뷰크너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 “지난 한 해 동안에 당신이 울었던 일을 기억하여 보십시오. 그 순간이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정직하였고 잊어버렸던 당신의 뿌리를 어루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 밑바닥 뿌리에서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두 개의 눈을 가진다. 하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감격에 찬 눈동자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를 가장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신다. 유창하게 기도하며 자기를 내세우는 바리새인은 전형적인 종교인이었다. 예수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稅吏)의 기도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가르쳤다.

크리스천이란 남달리 착하거나 거룩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하는 사람, 회개하는 교회, 회개하는 민족이다.

1만 가지의 선행을 쌓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 신의 진노를 잔잔케 하는 유일한 제물이 회개이다. 예수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회개가 선행되지 않는 예배는 무효라는 뜻이다.

회개는 뉘우침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회개는 변화를 위한 결단이다.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향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회개가 마음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변화된 삶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회개란 ‘일단 정지’이다. 빨리 달리다가 직각으로 회전하려면 일단 멈추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자기의 힘에 의한 속도를 일단 정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힘에 자신을 위탁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란 나의 약점과 나만이 아는 나의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는 복종의 태도이다.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없이 구원은 일방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운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일이고, 둘째는 싫어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셋째는 무사한 중에 회개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예수의 요구 사항이기 때문에 예수 믿기가 힘든 것이다.

특히 셋째 사항인 무사한 중에 회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죄가 드러나 법정에서 심문을 당했을 때 사실을 털어놓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다. 회개는 자발적인 성격을 띈다. 아직 무사 할 때, 아무도 나를 추궁하지 않을 때, 오히려 숨기고 있는 것이 더 편하고 체면도 서고 존경도 받을 때 자발적으로 “내가 잘못했다. 내가 죄인이다.”하고 고백하기는 정말 힘든다.

그러기에 회개하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용서가 가능하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 요나서는 회개를 나의 영토 포기, 나의 방향 포기, 나의 시위(示威) 포기의 세 가지로 해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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