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래된 서점

2015-01-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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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겨울 방학을 맞은 아이와 보스턴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이의 친구들과 함께 한 여행이었기에 아이들 위주의 뮤지엄, 수족관 등의 일정으로 여러 날을 빽빽이 채운 스케줄을 세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담아오길 기대하는 여행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아직 한참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세계 최고의 대학의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의 금색으로 닳아 반짝거리는 발을 만지작거리고, 정원을 같이 걸으며 도서관을 지나며 먼 미래에 앉아 그곳에서 책에 파묻혀 지낼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정원을 둘러보고 나와 대학가를 두리번거리며, 길거리에 즐비한 노천카페와 길거리 연주자들의 음악을 들으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바로 서점이다. 낯선 동네에 가면 먼저 책방이 있는지 둘러보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지식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긴 여행에서 지친 여정이 풀리고 마음도 한결 안정되는 묘한 느낌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도서관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동네 책방은 아무데나 자리 잡고 앉아 원하는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학입시를 위해 족보를 구하는 곳이었고, 선배들의 깨알 같은 주석이 쓰인 교과서를 구할 수 있었고, 당시 유행하는 인기가요와 팝송을 녹음해주는 곳이기도 해서 많은 친구들로 북적였다. 대학입시를 위한 책 구입이 주목적이었지만, 꿈만은 십대의 우리들은 여전히 소설속 주인공들에 자신을 대비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울고 웃었고, 간결하게 써내려간 수필과 시를 읽으며, 우리의 푸르디푸른 청춘을 그 시간 안에 곱게 접어 담아냈다.


토요일이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서점으로 달려가 10대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 줄 책들을 찾아 헤맸고, 삶에 대한 궁금증으로 철학책을 읽고, 로맨스를 꿈꾸는 여고생으로 소설을 읽어댔다. 돌도 씹어 소화시킬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그 시절 우리는 책에 파묻혀 배고픔도 잊은 채 책방이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 주인아저씨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가며 엉덩이를 붙여 앉아 있곤 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서점의 좁은 복도는 책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안정감을 주었고, 바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한 숨 쉬어가게 해주었다. 종이의 낱장을 넘기며 다음 이야기를 두근거리며 읽어나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에게 책을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해 나름의 육아법을 적용하기 위해 자주 서점에 갔었다. 추운 겨울날엔 따뜻한 실내에서, 그리고 더운 여름날엔 시원하게 앉아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고 아이가 좋아하는 기차테이블과 스토리타임은 엄마가 해줄 수 없는 생생한 구연동화를 즐기기에 충분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휴식공간이자 고향집 같은 기분으로 들락거렸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이후 서점에 가는 횟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아이에게는 그곳이 가장 완벽한 놀이터였다. 학습에 필요한 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에 들러 필요한 책을 문의하니 조회를 마친 직원이 이제는 더 이상 그 책은 서점에 구입 할 수 없고 인터넷으로 주문 할 수 있을 거라며 마지막 한숨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주위 서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유일하게 남은 이곳도 찾는 손님이 많지 않아요, 모두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고 이젠 책도 컴퓨터로 읽는 시대잖아요.

이젠 이곳은 희망이 없어요.”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것도 고객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푸념하듯 말하는 그녀와 마주앉아 한참을 얘기했다. 생각해보니, 뉴저지에 살기 시작한 10년 전쯤엔 동네서점도 여러 곳이었고, 대형서점들도 곳곳에 있었는데, 이젠 모두 사라지고 있고, 나도 꽤 먼 거리를 달려 유일하게 남은 그 서점에 들르고 있었다. 아이에게도 우리가 가진 그 아름다운 추억을 물려주고 싶은데, 이렇게 추억가득한 공간이 이젠 희망이 없는 곳이라니, 내내 서글펐다.

가끔씩 가장 비싸고 빠르게 변화하는 맨하탄에서도 골목골목 찾다보면 작고 오래된 서점을 발견한다. 그러면 속으로 되내인다. 휴 다행이다. 아직 건재해 줘서,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도 가는 끈을 잡고 있어야만 기억되고 이어지는 것이 인연이다. 낡은 서점에서 맺었던 책 읽는 설렘의 인연이 우리 다음세대에도 이어지길 바라고, 동네 곳곳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평안함을 주는 안식처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민다미<갤러리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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