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갈대와 같이 처세하는 사람

2015-01-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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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산에 올라가 보면 여러 가지 구경을 할 수 있다. 우선 수많은 나무들을 볼 수 있고 그들은 등산하는 사람들을 반갑게 해준다. 나무 뿐만은 아니다. 어느 곳에는 갈대들이 수북이 피어 있어 바람에 하늘대며 반가운 듯 고개를 숙인다. 언제인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산을 찾았을 때다. 수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갈대숲을 보니 쓰러진 갈대들이 없이 모두 꼿꼿이 서서들 있다. 덩치 큰 나무들이 쓰러진 건 센 바람을 견디지 못해 꺾여 부러져 나간 거다. 하지만 가느다란 갈대들은 무섭게 내려치는 비바람에도 하늘대며 이리 고개 숙이고, 저리 고개 숙이면서 살아있음을 본다. 약한 것 같지만 갈대의 유연성이 갈대를 살렸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36장 미명(微明)·은오(隱奧)편에 보면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이란 말이 나온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이 담겨있다. 갈대가 험한 폭풍우를 이기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음에야. 갈대의 순정이란 말도 있듯이 갈대는 바람 부는 데로 몸을 맡긴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중국 철학의 중심에 서 있는 노자의 사상은 부드러움을 강조한다. 다투지 말고 이치에 따라 살아가라 한다. 큰 강이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음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 싸우는 자는 성을 내지 않으며 족하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한다. 노자는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인의 부드러움을 과히 남성들이 따라갈 수 있을까. 없다. 조물주가 창조한 창조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게 여인의 몸이라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던가. 어찌 여인의 몸만 부드러운가. 여인의 마음 또한 유연하지 않은가. 갈대 같은 여인이라지만 폭풍우와 같은 험한 세상에서 가족을 살려내는 이 또한 여인들이다.

갈대처럼 굽힐 줄 아는 사람이 큰 사람이 됨을 본다. 그렇다고 비굴하게 굽히라는 것은 아니다. 불의엔 맞서되 유연성으로 맞서고 그 유연함으로 불의를 이기는 게 진정한 이김이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바로 겸손이다. 겸손한 자 절대 강하지 않다. 부드럽다. 물처럼 낮은 곳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승리한다.

도덕경 제42장 충화(沖和)·생성(生成)편엔 이런 말도 나온다. 강량자(强梁者) 부득기사(不得其死). 아주 강한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하고 요절한다는 좀 서늘하고 섭섭한 뜻이 담겨있다. 템포가 있는 사람들, 즉 화를 많이 내는 강한 사람들 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이란 말이 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속은 강하고 굳센 사람을 말한다. 내공(內空)이 강하다란 표현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참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가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도자의 처음 덕목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귀감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미소를 짓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갈대와 같이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아무리 강한 폭풍이 불어 닥친다 해도 고개를 숙이어 바람에 맡기며 살아남는 갈대와 같은 사람. 그러나 태풍 같은 역경이 지난 다음 다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부러워지는 세상이 지금 세상인 것 같다. 하루 앞을 내다 볼 수 없이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겸손한 사람, 갈대와 같이 처세할 수 있는 사람, 물처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닐까. ‘유약승강강, 강량자부득기사’. 2,500여년 전, 중국의 노자가 한 말이지만 지금도 유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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