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은 물이다

2015-01-1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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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새해맞이로 무엇이든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그런데 책꽂이에서 뽑아든 책은 ‘노자(老子)와 21세기’다. 너나없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시대에 이 책을 선택하다니 뒤로 되돌아갈 셈인가.

하여튼 습관적으로 팔장(八章) 상선약수(上善若水)를 폈다. 이 제목의 뜻은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이고, 저자 김용옥에 따르면 한국 내에 가장 많이 걸려있는 액자의 구절이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또한 노자는 지식을 알리는 책이 아니고, 지혜의 모음이라고 말한다.


지혜와 지식은 분명히 다르다. 지식이 인식으로 얻어진 성과라면, 지혜는 한마디로 ‘슬기’를 말한다. 어렸을 때 본 책의 그림이 되살아난다. 커다란 물독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는 장면이다. 그 때 한 어린이가 커다란 돌로 독을 깨뜨렸고, 쏟아지는 물과 함께 독에 갇혔던 어린이가 밖으로 흘러나온다. 지혜로운 어린이가 친구를 살린 것이다. 지식이 학문을 닦으며 얻을 수 있다면, 지혜로움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상생활을 생각하면서 이루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노자는 공부하는 책이 아니니까 그냥 부담 없이 정직하게 느끼는 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게도 편한 마음으로 손쉽게 때때로 펴드는 책이 되었다. 그 중에서 ‘상선약수’를 수없이 읽는 까닭은 시시때때로 목마름을 느끼기 때문이다. 목마를 때의 청량수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이 부분이다.

부친 별세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받고 필자의 첫마디는 ‘미안합니다’였다. 그리고 허둥지둥 귀국 길에 올랐다. 주위의 모든 것이 부옇게 보이면서 삶의 의욕조차 멀리 떠나는 느낌이었다. 항공사는 태평양 상공에서 콜로라도 지역의 샘물을 제공하였다. 그 때의 산뜻한 물맛이, 며칠을 슬픔에 젖었던 필자에게, 조용히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하였다. 그 이후 물에 대한 애착과 감사하는 마음이 ‘상선약수’로 이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을 가진 상선약수(上善若水)‘이다. 이어서 간단하고 쉬운 말로 물의 도덕을 갖춘 바른 품성을 알려주는 해설이 뒤따르면서 ‘가장 좋음‘을 증명하고 있음이 팔장의 내용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 물은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다스릴 때는 질서 있게 하기를 잘하고, 일할 때는 능력 있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 잘한다... 등이 물이 가진 성품이라고 여기서 분명히 밝힌다.

‘상선약수’의 이런 내용이 내 자신의 일상생활을 조용히 뒤돌아보는 체크 포인트가 된다. 물이 ‘H₂O’ 이상의 충언을 하는 친구로 다가온다. 이런 친구가 있음은 다행이다. 때로는 가끔 만나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새하얀 헝겊으로 거울을 닦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다. 친구가 예쁜 거울을 주었다. “웬 거울? 별로 화장을 하지 않는데...” 그 친구가 곧 내 말을 받았다. “거울이 얼굴만 비춰 보나?” 맞는 말이다.

물은 물이다. 물은 인공적인 제품이 아닌, 자연의 선물이다. 물은 가장 흔하고, 가장 귀하다. 지구의 모든 생명을 키우면서, 말이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살리면서, 모르는 척 한다. 물은 가까이 있으면서, 멀리 있다. 물은 흔하면서, 귀하다. 물의 뜻은 간단한 것 같지만, 개념의 뜻을 확정하여 명백하게 밝히기 어려운 존재다.

물 마시는 사람들, 비를 맞는 초목들, 바닷가의 사람들, 빨래하는 일상생활, 목욕하는 사람들, 오아시스의 물을 찾는 여행객들, 웅덩이의 물을 마시는 광야의 동물들... 이렇게 삶과 물의 관계가 밀접하지만 물의 목소리가 없다. 이 세상 생물들이 물과 같이 조용히 생활하면 지구에서는 삶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지. 그래서 우리는 큰 소리 치며 물과 함께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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