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펜젤러 박사와 세월호

2015-01-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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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옥 (의사)

올해는 파란 눈의 젊은 아펜젤러(Appenzeller) 박사가 제물포 인천항에 도착한지 벌써 130년째가 되는 해이다.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와 드류 신학교를 갓 졸업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지성이었던 그는 미개한 한국에 주님의 복음과 새로운 서양학문을 전수하고자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웠다. 배재학당은 고종황제가 친필로 손수 작명해주었다.

그는 모든 정열과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들을 키웠고 이승만, 서재필이 그의 수제자들이다. 성경과 신학문뿐만 아니라 유도도 직접 가르쳤다. 유도의 낙법, 떨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우뚝 일어서는 칠전팔기의 투혼, 이승만의 불굴불요의 독립정신은 배재유도장에서 다듬어졌다. 아펜젤러의 훌륭한 리더십은 한국 근대화 발전을 앞당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집회에 참석차 구마가와마루 일본증기선을 타고 인천에서 출항해서 내려가던 중 화물선과 충돌해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다. 함장실에 편안히 타고 있었던 그는 선장의 강력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같이 동행했던 이화여고 학생 3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 밑창까지 뛰어 내려갔었다. 그는 다시 살아나오지 못했다.

그는 수영선수였기 때문에 혼자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 묘는 비석뿐인 가묘이지만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인류애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영원히 살아 남아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강추위가 매섭게 몰아치는 팽목항을 아직도 못 떠나고 있다.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 것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300여명의 다 피어보지 못한 어린 꽃봉오리들은 “엄마 사랑해, 살려줘”를 애타게 울부짖고 있었건만 한번 닫쳐진 바깥문은 꼭 잠긴 채 영영 열리지 않았다.

선장은 아우성을 외면한 채 비밀통로를 통해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함장과 선원들은 모두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배 밑창으로 내려갔어야만 했었다.
양띠 새해에는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44세의 젊은 나이에 낯선 이국에서 남을 위해 자기 몸을 초개처럼 버린 아펜젤러의 헌신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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