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종문제의 여러 얼굴

2015-01-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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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자문위원 글마당/ 생각해봅시다

1968년 미국에 온 후 46년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보고 경험하고 배운 바 미국 인종문제의 몇 가지를 짚어본다.

1969년 필라델피아 근처에서 남편이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자, 나는 학교 인근지역에서 아파트를 구하러 나섰다. 신문광고를 통해 알맞은 아파트 하나를 발견하고 주인과 계약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백인남자 주인은 우리를 보자 얼굴색이 달라졌다.

그는 미안하다, 한국 사람은 곤란하다 면서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놨다. 멍한 가슴을 안고 우리는 어이없는 발길을 돌렸다. 이런 마음이 오늘날 인종차별의 굴욕을 겪는 흑인들의 고통과 거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듬해에 남편 학교의 학장이 추수감사절 저녁식사에 우리를 초대했다.


미국역사에 상투적인 지식만 갖고 있던 나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터키와 원주민과 필그림에 관한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믿었고 먹음직한 터키를 기다렸다. 그런데 나온 것은 벌겋게 구어진 연어였다. 나는 터키는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 집 세 명의 딸들 중 가운데가(대학원생) 이렇게 대답했다:“링컨 대통령이 1863년 땡스기빙데이를 연방 공휴일로 선포했을 때 이 날을 택한 이유는 청교도나 터키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어요. 훌륭한 청교도들이 유럽으로부터 대양을 건너와 신천지에 정착해서 원주민들에게 호의와 자선을 베풀었다는 얘기는 전설입니다. 1863년 백인 시민군은 뉴잉글랜드 커네티컷 일대에 살고 있던 Pequots 인디언 부락을 습격하여 어린이, 노인, 부녀자를 포함 700여명의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고, 살아남은 인디언들은 노예로 팔았답니다. 이것이 백인들이 감사했던 대승리였고 그 해 땡스기빙데이를 제정하게 된 동기가 되었어요. 살아남은 Pequot 인디언들도 매년 그날 제사를 지냅니다. 슬픔과 분노와 아픔을 승화시키기 위해서지요. 우리 가족은 추수감사절에 터키를 먹지 않고 Pequot 부족민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그들이 선호했던 채식과 생선, 연어를 먹습니다.”

그후 25년이 흘러, 우리는 미국 시민이 되었고, 세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해 학군이 좋다는 뉴저지의 써밋이란 동네에 살게 되었다. 직장도 안정됐고, 전문 직업인으로서 지역봉사에도 힘썼다. 써밋은 한때 미국 동부에서 가장 살기좋은 부촌이라고 꼽힌 적도 있는 약 2만의 인구와 6평방마일의 작은 시청 소재지로서, 특이하게도 이 행정구역이 전형적인 미국전체의 축소판을 이루고 있었다. 더 특이한 현상은 한 동네 안에서 뉴욕시로 직행하는 기차길을 경계선으로 북쪽과 남쪽이 갈라져서,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이었다.

북쪽 백인들의 자녀들은 일류 대학에 집중적으로 입학했다. 반면 기차길 남쪽에는 불법신분의 흑인, 라티노들이 허름한 주택가에서, 주로 북쪽 부자들을 위한 하인계급의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여기서는 범죄관련 문제가 자주 생겼고, 자녀들의 고등학교 졸업률이나 대학 진학률이 낮았다.

그래서 이 두 지역이 한 동네로 보고될 때 나오는 결과에 불만스럽던 지도급들은 자기네 동네를 미국의 모범적인 지역사회로 만들기 위해 소위 ‘Summit 2005’란 범시민 운동을 시작했다. 그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동양계 전문직업 여성인 내가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막강한 백인 지도자들은 나를 그들 사이에 두고 소수민족을 대표하게 한다면 그들의 골칫거리가 줄어질 것으로 기대한 듯 싶다. 흑인 청년이 아버지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시내에 들어오면 금방 네거리에서 경찰이 나타나 차를 정지시키고 조사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데도 당시 갑부 시의원들은 “Diversity Committee의 초점이 더 이상 인종문제가 될 수 없다고 뜻을 모았다. 그때 나는 분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사직하고 나왔다. 그 이후 미국은 여전히 인종문제로 떠들썩하다. 그 근원은 무엇인가. 어떤 이유로든 한 인간의 신성을 침해하고 배척하는 행위는 범죄이전에 신성모독이다. 누구라도 피해자는 죽여도 죽지 않으며, 죽는 이는 오직 가해자뿐이라는 사실을 알자.

윤지윤(교육가/ 엔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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