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월이 가고 오고

2014-12-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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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만일 줄기가 곧게 자란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위에서 저 땅바닥까지 기어서 내려가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벌레는 한 발을 내디디면서 고만 미끄러져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만일 까마득한 옛날 시작되어 까마득한 먼 앞날로 이어지는 세월이라면, 사람들은 모두 지치고 말 것이다. 거기에 매해의 구분을 마련한 인류는 지혜롭다. 우리의 생활은 이 구분에 따라서 정리되고 거기에 따르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계절이다.

웬 정리할 것이 이렇게 많은가. 책상서랍부터 시작하여 생활 주변의 온갖 것에 한 차례씩 눈길을 주고 매만지게 되는 계절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쌓인 사연들을 되돌아보는 것도 세말의 특색이다.


지난날들은 그대로 뜻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낸 날들이 아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쌓아올린 날들이다. 그날들의 크기, 모양, 색깔에 관계없이 힘껏 쌓아올린 날들은 하나의 생활탑이다. 이 탑이 묻는다. 다음 해에는 더 튼튼하고, 더 높고, 더 다양하고, 더 개성적이고, 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론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내 자신의 탑이란, 으레 내 노력의 결과이니까.

아, 재미있는 글이 생각난다. 주인이 하인을 나무란다. “왜 구두를 닦아 놓지 않았느냐”고. 하인이 대답한다. “다시 더러워질 걸요.” 그 주인은 생각한다. 어제 식사하겠다는 하인을 보고 “다시 곧 배가 고파질 텐데... 뭔 식사?” 라고 꾸짖던 일이다. 잠깐 뒤 바다에 뛰어 들어갈 해녀도 바닷가까지는 우산을 쓰고 간다고 한다. 연말에 매년 같은 일을 되풀이하더라도 그것 또한 생활의 재미지 않나.

A는 언제나 뒷정리를 잘 한다. 그래서 전의 것에 관한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다. 참고물이 필요할 때는 그것들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B는 뒷정리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은 길러진 습관의 연속이다. 키우고 싶은 생활 태도는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노력하는 시기를 가지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익숙해지면서 어느 틈에 하나의 습관이 된다. 잡다한 종류가 뒤섞인 일 더미 한 가운데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 다음 일을 생각하기로 한다.

어린이들이 새 장난감을 보면, 지금까지 가지고 놀던 것은 밀어놓고, 새 것을 즐긴다. 이런 경향은 새 학용품이 생겨도, 전에 쓰던 것을 밀어놓는다. 그러다가 다시 옛것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옛 장난감이나, 옛 학용품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습관도 기르고 싶다. 이런 습관이 길러지면, 거기에 알맞은 좋은 방법도 찾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씨로 올해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다.

세월은 오고 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일까. 여기서 후자를 택하는 이유는 가는 것은 쌓이고, 오는 것은 밝고, 무한대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는 것은 역사로 남고, 맞이하는 미래는 끝없이 이어짐을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현재임은 행복한 일이다. 두 방향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고, 바로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조용히 자리차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행형으로서 움직이고 있다. 진행형이란 살아있음을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숨을 쉬면서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세말이란 지나간 나날을 상자에 넣고, 새날맞이를 위해 새 상자를 마련하는 나날이다. 이것은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 세월이 떠나려고 발걸음을 옮기고, 새날들이 오려고 준비를 갖추는 이 계절의 주역은 틀림없이 우리 각자임을 깨닫는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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