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쉼, 멈춤이 아니라 동행이다

2014-12-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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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쉬고 싶다. 아무도 없는 외딴곳에 가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아무 일도 없고 아무 계획도 없이 뒹굴뒹굴 시간 때우며 며칠만…. 1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을 떠나 살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5년여 만에 나는 지쳐버렸다.

아무리 일이 많고 바빠도 언제나 나의 본업은 아내이며 엄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이가 없었을 때엔 저녁에 함께 귀가해서도 남편은 TV앞 소파로 나는 밥하러 부엌으로였고 아이가 생긴 후론 남편이 많이 도와줬었지만 그래도 집안에 관한 일은 항상 내 차지였다. 그나마 한국에 살 때는 여러모로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도움 청할 곳 하나 없는 미국생활이다 보니 모든 걸 내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사실 미국 생활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뭔지 모를 여유로움과 광활한 자연 그리고 자유로움이 있으니까. 그동안 시간에 쫓겨 자주 하지 못했던 요리도하고 처음으로 김치를 담궈 김장독에 넣어 보기도 하고 베이킹도 하고 뜨개질도 하고 물론 연주도 하고 강의도 하며 지냈다.
하지만 남들 다하는 가정 돌보는 일과 주부로써의 사소한 일거리들은 흉내만 내기에도 버거워 매일매일 힘겹게 아등바등 살아 온 것 같다. 그러다 어느덧 아이가 자라 대학교로 떠나고 남편도 출장이다 뭐다 바쁘고 집안엔 덩그러니 나만 홀로 남았다.
미국에서는 여자 나이가 비밀이라던데 이제 몇 년 안에 들이닥칠 무시무시한 숫자 5를 앞두고 드디어 꿈꿔왔던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했다. 겉으로는 선배언니네 교회에 가서 연주도 하고 지친 나를 돌보고 재충전해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속으로 자유다를 외치며 기간도 꽤 길게 잡았다.
오랜만에 다시 찾는 캘리포니아인지라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난 정말 내 인생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재충전해서 돌아오고 싶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었다.
이번 여행에서 꼭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2박 3일 동안 교회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주일에 1.2.3부 특송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만 끝내면 진짜 나는 자유인 거다.
그.런.데… 도착한 다음날 가볍게 따라나선 언니의 브런치 모임에서 친구의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연락이 왔다. 그 넓은 캘리포니아에서 하필 내가 묵는 곳 바로 옆 동네다. 심지어 시카고에서도 친구가 왔다고 했다.


나만 좋다고 하면 30년 만에 동창들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였다. 뭐 하루 정도야 괜찮겠지 싶어 반가운 마음에 만날 약속을 했다. 그리고 2박3일 일정 후 특송한 교회에서 또 다른 동창을 만났다. 후배를 만났다. 선배님도 만나고 뉴저지에서 이사 간 지인도 만났다. 그래서 거부할 수 없는 약속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뉴포트 비치. 라구나 비치. 말리부에 갔다. 게티 뮤지움도 갔다. 로데오 거리도 가고 한인 타운도 갔다. 그리고 라스베가스에 여행도 다녀왔다. 인생은 역시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렇게 장장 15일 동안 나에게는 단 하루도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매일매일 일정대로 움직이느라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번잡하지 않았다. 행복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목사님께서 주신 책을 열었다. 제목이 ‘쉼, 멈춤이 아니라 동행이다.’ 였다. 그래 맞다. 내 삶에 쉼이 필요해서 잠시 멈춰가려 했는데 함께해 준 좋은 사람들 덕분에 멈추지 않고도 재충전할 수 있었구나. 그렇다면 다시는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항상 쉼 이라고 하면 떠남을 생각했었던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이번 여행을 떠올려보면 아직도 꿈을 꾸고 난 것 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여러 곳을 다니면서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는지 너무너무 신기하다. 그 꿈같았던 시간 동안 동행해준 모든 친구들에게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해 주시고 채워주시는 그분께 넘치는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배경미 <오보이스트, 릿지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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