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어지는 박수

2014-12-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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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실험극장 라마마에서 있었던 일이다. 별로 큰 극장은 아니지만, 그 날이 마지막 공연인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는 만석이었다. 전기가 꺼진 무대를 향해 그대로 이어지던 박수갈채는 관계자들의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관객들은 왜 그렇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때 손뼉을 치나? 기쁠 때, 같은 생각일 때, 반길 때, 용기를 주고 싶을 때, 사랑할 때... 등 다양하다. 그렇다면 ‘템페스트’ 관객들의 박수는 무슨 뜻이었을까. 작품의 원작자에 대한 것이었다면 그건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날의 공연에 대한 박수였다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관객들은 무엇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일까?


그 날의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닌, 오태석의 ‘템페스트’였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갈등, 왁자하고 떠들썩한 일, 소란스러운 일들이 가라앉으며, 용서와 사랑이 움트는 사연이었으니 한국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거의 다 영어권 관객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였을까? 연극의 진행에 따라 무대의 뒷면 검정 막에는 핵심 대화가 크고 확실한 흰 글씨로 나타났으니까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언어의 장벽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관객의 박수는 무엇에 대한 것이었나? 연극을 좋아하는 필자는 공연을 볼 때, 분석 관람하는 버릇이 있다. 전체의 분위기, 무대 장치, 배역, 대화, 안무, 의상, 음악 효과...등 하나같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번 공연을 보면서 모든 면에서 만족하였고, 많은 것을 배우는 즐거움이 있었다. 한 마디로 연극 전체가 압권이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각 배우들의 표정과 움직이는 위치와 거리, 타이밍, 몸동작 등이 계산에 어긋나지 않고, 지나치지 않고, 모자람이 없음을 보면서 그동안의 연습 과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연극이 종합예술임을 확실하게 알려준 작품이었다. 또한 2011년, 에딘버러 국제 예술제에서 ‘헤럴드 엔젤 상’을 탔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마마 극장의 박수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들은 말없는 박수를 그렇게 오래 보냈는가. 출연자 관계자 전원이 의상을 갖추고 무대 위에 석 줄로 나란히 앉아, 관객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박수가 이어지니까 일동 일어섰다 다시 정좌하고 또다시 인사를 하였다. 이런 절차가 서너 차례 계속되자 그들은 아예 머리를 마룻바닥에 조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박수가 계속되니까 전원이 퇴장하면서, 무대 위의 전기를 껐다. 그제서야 관객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광경이 벌어졌을까? 관객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에 감명 받은 것일까? 그들은 오태석의 ‘템페스트’ 각색에서 그의 창의성을 발견하고 열광한 것이다. 극본, 연출, 무대장치, 음악, 안무에 이르기까지 한국작품으로 만든 그는 창의적인 재능, 노력을 이 작품에 흠뻑 쏟아 부었다.

창의력은 새로운 생각을 하는 능력이다. 창간, 창립, 창단, 창업, 창작, 창제... 등은 무엇인가 처음으로 이루었다는 뜻이다. 영국 극작가의 작품을 각색 연출한 오태석은 새로운 한국적인 작품을 창작한 것이고, 관객들은 이를 보고 열광한 것이다. 한마디로 오태석의 창의력에 보낸 박수였음이 확실하다.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재주가 있다. 말재주, 손재주를 비롯하여 가지각색 재주가 있다. 그런데 이런 재주의 바탕에 창의력이 깔리면, 이것은 더 귀중한 것이 된다. ‘템페스트’에 한국 오태석의 창의력이 깔리니까 천하의 예술 작품이 된 것이다.

청중의 끊이지 않는 박수는 바로 이 창의력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 줄 안다. 다음 세대의 창의력을 기르려면 마음의 자유로운 공간을 주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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