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움의 계절

2014-11-24 (월)
크게 작게
김명순 (수필가)

창밖을 보니 샛노랗던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파란 잔디에 수북하다. 물기에 젖어있는 잎들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싱싱하다. 나무의 본체로부터 떨어졌으나 죽었다는 실감이 되지 않는다. ‘죽을 줄 모르는 죽음으로’라고 썼던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나뭇잎은 떨어져 썩을 것이나 죽은 게 아니라는 생(生)의 철학이다. 뿌리는 땅속 깊이 살아서 다음 생을 준비하며 우주의 색깔을 바꾸는 계절의 경이로움 앞에 숙연하지 않은가.

사람의 한 평생도 그런 것 같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결혼을 시켜 떠나보내고 단풍을 떨친 한 그루 나무처럼 남는다. 얼마 전, 지인의 아드님 결혼식에 참석해서 “이제 아들을 잃고 딸을 잃어야 합니다. 9시 이후에는 전화하지 마시고 방문 전화는 한 달 전쯤(?)하세요.”라는 주례사를 들었다.


30년이 넘게 애지중지 키웠던, 사랑하는 아들, 딸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라는 당부겠으나 생각되는 게 많았다. 비움은 충만의 또 다른 이름인데 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지난 시간 속에 새겨진 추억의 무늬들은 잃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가끔 그리움의 파랑새가 찾아와 텅 빈 공간을 채워 줄 것이며 생(生)의 예쁜 노래도 불러주지 않을까. 손자 손녀의 재롱도 행복한 웃음이 되게 하리라.

고국에는 칠십이 넘은 언니들이 살고 있다. 전화를 할 때면 “언니들 걱정은 하지 말거라.”한다. “내가 언니들 걱정을 왜 해요? 타국에 사는 내가 더 걱정이지.”하면서 웃는다. 그러고 보니 언니들의 건강과 다가올 죽음이 걱정되긴 했다. 나는 언니들의 노후가 단풍잎이 져버린 나무처럼 초연하길 바랐다. 현세에 대한 애착이나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지 싶다.

나무는 단풍잔치가 끝나면 완전히 벌거벗은 육신으로 겨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여주는 차가운 계절과 맞서야 한다. 그래도 두려워할 게 무언가. 예쁜 새싹들을 키웠고 초록 잎들로 무성했고 울긋불긋 고운자태로 한 세상 즐겁지 않았던가. 나목으로 겨울과 마주한다 해서 허망하고 슬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거리에 뒹구는 낙엽들을 보려니 “오늘은 멀리 떨어져 있는 딸아이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라고 썼던 누군가의 심정이 된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계절, 잃어버린 그리움을 찾아 텅 빈 심상에 새로운 무늬를 그려 넣어 본들 어떠리. “아직 그리움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비우면 채워지고 잃으면 얻게 되는 섭리가 있지 않은가.

텅 빈 우주가 만상(萬象)을 피워 올리듯 소우주인 인간도 비움에서 많은 것들을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 단풍의 떨어짐은 뿌리의 보존을 위한 희생이고 영원한 생명의 노래가 아닌가. 인간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죽어도 죽지 않는 나무처럼 의연하게 살 수는 없을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