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외할아버지를 닮았구나

2014-11-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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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미(갤러리 부관장 )

40여년의 인생을 사는 동안 부모님과 함께 매일 밥 먹고 얘기 나누고, 여행 다녀 본지는 2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어린 시절 이후엔 새벽별보고 등교하고 입시에 시달리다가 대학에 가고 유학을 오고, 졸업 후 일에 파묻혀 지내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미국에 와 살다보니, 같이 얼굴 맞대고 하루 종일 있어본지가 까마득했다.

기억속의 나의 아버지는 늘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시는 분이었다.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쌓여있는 책이 가득해, 도서관 분위기가 나는 아버지의 서재는 나의 놀이터였고, 자주 들어가 아무 책이나 읽어댔다. 반항 아닌 반항을 온 몸으로 실천하며, 사춘기를 보내느라 입을 굳게 닫아버린 내게, “오늘 아빠는 학교에서 말야,,,” 라며, 당신의 하루를 먼저 꺼내 보이셨다. 친구들은 “어떻게 아빠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냐?”며 시샘 섞인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외모부터 성격, 입맛까지 나와 아버지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멋 부리며 짧게 바가지머리를 고수하던 때는 아드님이 아버지를 쏙 빼다 닮았다는 말을 수없이 듣곤 했다. 가끔 아이에게 “넌 외할아버지를 닮았구나”라고 말하며 혼자 웃곤 한다. 그런데, 미국으로 와, 이민생활의 쓸쓸함과 결혼생활과 일, 육아에 대한 어려움의 속내는 오롯이 어머니에게만 털어놓았고, 아버지는 손자와만 “보고 싶다. 사랑한다”를 연신 반복하는 통에 찬밥으로 전락한 나는 즐거운 질투로 불타갔다.

우리 집에 머무르시던 어느 날, 아버지가 엄마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셨다고 한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장 출근하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로 데려다주던 것을 계속하던 어느 날, 집 주위를 산책하시다 걸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보신 이후 처음부터 같이 걷지 못한 게 안타까우셨나보다. 그 이후 절대 자기물건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손자의 가방을 겨우 설득해서 짊어지고는 서툰 영어와 한국말로 대화하며 도란도란 정답게 학교로 향했다.

단 돈 천원도 쓸데없는 것이라면 사치라고 아끼시는 분이 아이생일엔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겠노라 하고 거금을 들인 장난감을 두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한국말로 하지 않으면 이 장난감은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거야” 라며 협박을 하는 나에게 찡긋 웃으시더니 “한국말 어렵지? 할아버지도 영어가 어려워. 그렇지만, 우리 둘 다 노력하면 우린 훨씬 더 많이 이야기 할 수 있어. 할아버지, 할머니랑 한국말로 더 많이 이야기하면, 더 좋은 선물을 또 사줄 거야” 라고 하셨다.

매주 토요일엔 손자의 축구경기에 가서 감독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그리고 열정적인 미국부모들보다 훨씬 큰 소리로 응원하고 코치를 하며 둘만의 귓속말로 “할아버지가 알려준 비밀로 다음번엔 더 잘 해보라”고 하셨다.

함께 떠난 워싱턴 여행에서 수 십 년 전의 지인을 만나 젊은 시절,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장발을 한 청년시절의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버지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열심히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다니셨다.

단풍이 아름답다는 버지니아의 쉐난도우국립공원은 채 단풍이 물들지 않았다. 몇 십 마일 꼬불꼬불 불안한 산길을 달려 루레이동굴에 들러 돌아오는 길 혹시나 싶어 다시 찾았지만 안개는 여전히 자욱했다.

기억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자상하고 속정 깊은 아버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닭살멘트를, 하루세끼 시레기된장국을 먹어도 절대 질려하지 않는, 당신의 입맛까지 꼭 닮은 손자에게 날마다 퍼부으셨다. 이제 각자 할아버지는 영어공부를, 손자는 한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만나자며 대성통곡하는 손자를 꼬옥 안아주시고는 떠나셨다.

엄마가 정성스레 말려주신 시레기를 삶아 만든 된장국 두 그릇을 뚝딱 비운 아이 손을 잡고 축구장으로 가면서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비밀이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아이는 씩 웃더니 “비밀이야”라며 축구장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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