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곰과의 세 차례 대면

2014-11-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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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수요일 아침 7시경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무슨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다. 밖을 내다보니, 바위만큼이나 큰 검정색 곰이 집 옆쪽으로 해서 경사가 가파른 뒤뜰로, 두발로 서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서둘러 카메라를 찾아가지고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곰은 이미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분 정도 밖에 안됐는데 그렇게 빨리 흔적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텅 빈 들판, 잠잠한 수목. 돌계단과 작은 정자 모두, 들뜬 내 마음과 아쉬움에는 아랑곳없이 고요와 평정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곰과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첫 번째 만남은 큰 호수가 구비 구비 널려있는 동네, 레이크 호팻콩(Lake Hopatcong)에서 였다. 그곳에 있는 한국인을 방문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커브가 심하고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호숫가를 떠나 고지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607번 도로 위에서 갑자기 검은 쓰레기 자루 같은 것이 길을 막아 급정거했다.


그런데 그 쓰레기 자루가 움직이며 도로를 횡단하려는 것이었다. 아니, 이것은 쓰레기 자루가 아니라 한밤중 같이 새까만 곰이었다. 네발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털은 윤기 있게 반짝였으며, 눈과 귀는 몸에 비해 작으나 몸과 동작은 둥글고 부드러웠다.

자동차의 접근이나,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과 강아지에는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다. 그의 태도와 눈빛에는 공포나 위협, 방어자세 같은 것이 곁들여 있지 않았다. 아마도 유년기를 채 지나지 않은 듯, 젊음 때문에 사람이나 사람이 만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자연이 부여하는 존엄성 때문인지, 그가 주는 메시지는 마치 “이곳은 내 영토요. 그대들의 접근을 모른 체 할거요. 길이나 자동차 같은 건 하루살이 같이 잠정적 현상일 뿐이니, 내가 아는 체 할 필요가 없겠소.”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에너지는 한마디로 신성, 고요, 평안 같이 보였다.

두 번째 곰과의 상면은 내 집 앞뜰에서였다. 일기가 온화했던 가을날 아침 나는 강아지 라일라를 혼자 앞 정원에 내놓고 그것이 볼일을 보는 동안 현관문 유리창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집 오른쪽으로부터 누르스름하게 검은 큰 곰이 두발로 걸어 앞 정원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내 가슴은 비상사태에 걸려 마구 뛰기 시작했다. 위급한 결정이 필요했다. 첫째, 뛰어나가 라일라를 부둥켜 앉고 재빨리 집으로 들어온다. 두 번 째, 우산이나 막대기 같은 걸로 이 곰을 위협하여 쫓는다. 세 번째, 라일라가 아무 영문 모르고 있으니, 일을 괜히 만들지 말고 곰이 지나갈 때를 기다린다.

그런데 이 오던 곰이 발을 멈추고 라일라를 한참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슬며시 발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도 라일라는 흙냄새 맡으며 빙빙 돌다가 작은 볼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뛰어나가 라일라를 끌어안고 “아이 착해, 우리 강아지”하며 내심으로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내 감사함의 대상은 첫째, 그 너그러운 곰, 다음에는 천지를 모르나 본능의 지혜를 따른 라일라, 또 경거망동하지 않고 기다리도록 나를 도와준 내적인 지도 등이었으리라. 라일라와 나는 그날 오랜 등산길에 올라, 서로를 많이 뽀뽀하고 포옹했다. 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산속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검정 곰들에게 또다시 고마운 마음을 보냈다. 윤지윤<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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