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당한 어느 날

2014-11-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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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영(병원 수퍼바이저/ 잉글우드 클립스)

아침식사를 한 후 비타민을 먹는다는 것이 그 옆의 수퍼 타이레놀 피엠을 먹었다. 찬장 안에 나란히 서 있기는 하되 병의 크기도 색깔도 전혀 다른 것을 뚜껑을 열고 두 알을 꺼내어 물을 따라 입에 넣을 때까지 내 분별 신경계통은 아직도 취침 중이었는지 목구멍에 넘기는 순간 잘못된 것을 알았다.

살이 찐다고 투덜대면서도 부족할지도 모를 영양과 늙어가는 뼈를 염려하여 잊지 않고 비타민을 챙겨 먹겠다는 의지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유난히 약에 약한 편이라 감기에 걸려도 약보다는 레몬을 넣은 차를 마시고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최선책이라 믿어 약을 피하는 터이다.

사태파악을 하고 아연해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하니 이미 목 줄기를 타고 위장에 내려앉았을 약이 마치 독약이라도 삼킨 듯 황당하기만 했다. 엎질러진 물이라면 닦아내면 되건만 이건 도리가 없다. 사과를 먹으려다 오렌지를 먹은 형편과는 또 다른 것이다.


타이레놀 한 알만 먹어도 졸리고 맥이 빠져 빌빌거리는 판인데 쌩쌩한 몸에 피엠을 두 알씩이나 삼켜 버렸으니 비타민을 기다리던 내 몸속의 세포들은 무슨 운동을 시작할 것인가.

약 기운이 퍼지기도 전에 한심한 생각으로 맥이 빠져 부엌 의자에 앉아 방금 약을 꺼낸 찬장을 멀거니 바라본다. 언제부터인가 양념통이나 유리잔 같은 본래 자리를 차지했던 터줏대감들이 슬금슬금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약들로 채워지며 구석 아래 칸으로 쫓겨났다. 종류도 가지가지여서 약국을 차려도 한 구석은 차지할 양이다.

어차피 약병 뒤에 이 약을 먹고 차를 운전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기는 하지만 그 경고문이 없었더라도 차를 운전하고 나가는 것은 단념해야 한다. 황당해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결과에 계획했던 일,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접고 보니 소중한 하루를 허망하게 남에게 빼앗긴 듯 억울해진다.

그러나 화나는 일, 골치 아픈 일, 답답하고 복잡한 일은 될수록 덮어 버리고 생각지 말고 살자는 것이 내 생활 방식 인지라 딴 생각 말고 하루휴가를 받자고 마음먹는다. 그러고 보니 어느 신문에서 한 농촌 청년이 농약을 사이다인줄 잘못 알고 마시고 죽은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우리 집에 쥐가 있어서 쥐약을 놓았다가 그걸 먹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때 그 기사를 읽고 떠오른 생각은 농약이란 독한 것이어서 마시기 전에 그 냄새를 못 맡았을 리가 없는데 혹시 실수가 아니고 자살이 아니었을까하는 의심이었다.

정말로 몸이 나른해지고 누워 잠이나 자고 싶은 생각이 들어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별 잡생각이 다 떠오른다. 비타민 인줄 잘못 알고 쥐약 먹고 죽은 여자, 그런 기사가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리면 누가 애도를 해줄 것인가.

“쯧쯧 그런 정신 가지고 살면 뭘 해, 잘 죽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도 그 사람이 그렇게 바보인줄 몰랐네 하고 혀를 차다 낄낄 웃을 일이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돌다보면 앞 뒤 다 빠지고 그 여자 쥐약 먹고 죽었다는 소리만 남을 것이다. 그러다 상상의 꼬리에 이야깃거리가 가미되어 그 여자 평소에 고민이 많았다더라… 등등.

결국 그 여자는 쥐약 먹고 자살 했다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슬슬 감겨오는 눈을 주체하지 못한 채 까짓 타이레놀 피엠 두 알 가지고 죽는 이상체질이 아님을 새삼 감사하며 지저분한 공상의 날개를 접는다.

그리고 모든 잡다한 생각과 일은 집어 치우고 예기치 않게 얻은 하루의 휴가를 만끽하기 위해 집안에서 가장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 잘 드는 구석자리에 편안히 눕는다. 이렇게 계획하지 않은 하루의 휴가를 가져도 세상 돌아가는 데는 전혀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은 진리라는 다독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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