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 젊은 여인의 죽음

2014-11-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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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아동문학가/ 목사>


지난 일요일(11월 2일)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미국 신문들의 톱기사로 다루어졌다. 부리타니 메이너드(Brittany Maynard 29세) 양의 자살이다. 그녀는 뇌암 진단을 받고 6개월 더 살 수 있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날마다 고통은 더해 갔다. 그녀는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는 새댁이다. 메이너드 양은 캘리포니아의 집을 떠나 오리건으로 이사하였다.

오리건 주가 자살 약을 처방할 수 있는 미국의 유일한 주다. 오리건 주는 소위 ‘품위 있는 죽음 법(Death with Dignity Act)’을 가지고 있다. 오리건 주에는 이 법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이미 750명이나 된다. 메이너드 양은 그랜드캐년을 구경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졸라 그 몸으로 그랜드캐년을 찾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인간의 생명과 자연이다”란 말을 남겼다.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을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길로 나는 가고 있다’라는 뜻이 담긴 말이다.


생명은 존엄하다. 생명은 인간들이 평생을 투자하는 소위 성취와도 바꿀 수 없다. 인간은 안락(安樂)을 위하여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은 안락과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이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동력은 만족감에서 온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은 최고의 만족과도 바꿀 수 없다. 생명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며 싫으나 좋으나 인간은 그것을 받아야 하고 가꾸어야 한다. 흔히 바르게 산다고 하는 말은 내가 받은 생명을 빛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얼마나 사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존귀한 생명을 가진 인간은 이데올로기(이념)의 종이나 정권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기업가의 생산수단이나 경제 발전의 도구 이상의 귀중한 생명체이다. 불치의 환자나 생산성이 적은 장애자나 노인들도 완전한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들이 핵 찌꺼기나 화학약품 찌꺼기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복지사회란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아끼고 그 권리(인권)를 보호하고 존중히 여기는 사회이다.

생명은 도전이다. 정면으로 대결하라. 생명은 모험이다. 용감하게 그 바다로 출범하라. 생명은 의무이다. 참고 그 짐을 지라. 생명은 신비이다. 그 신비를 풀도록 사색하고 기도하라. 생명은 기회이다. 사라지기 전에 충분히 사용하라. 생명은 아름답다. 마음껏 찬양하라. 생명은 신의 선물이다. 감사함으로 사용하라. 예수는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않았다. 역사에 남을 만한 저서도 활동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남겼다. 그가 진 십자가는 곧 생명 사랑에 대한 값진 자국이었다.

어느 의과대학 교수가 물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렸고 부인은 폐결핵이다. 이 가정에 아이 넷이 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죽었고 남은 셋도 폐결핵으로 살 희망이 없다. 이 부인이 또 임신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한 학생이 얼른 대답하였다. “즉시 낙태수술을 시켜야 합니다.” 교수가 말하였다. “자네는 지금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이 불행한 환경에서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것이 악성이라 불리게 된 베토벤이었던 것이다.

중국 양자강은 연례적인 범람으로 수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옛날 모스코바의 역병은 25만 명의 생명을 죽였다. 일본의 관동(關東) 대 진재(震災)는 단번에 10만의 생명을 사라지게 하였다. 지구의 자연 재해는 해마다 20만의 생명을 죽게 한다. 이렇게 큰 신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면 살았다고 하나 죽은 인간이나 다름이 없다.

당신은 지난 1년 동안에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여 본 일이 있는가? 남의 죽음에 대하여는 생각도 하고 조문도 하지만 나도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어리석음은 없다. 인간의 죽음, 곧 사람의 제한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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