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죽음이란 명제

2014-11-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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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

죽음이란 명제(命題)는 인간사에서 가장 논의하기 힘든 것 중의 하나다. 다른 동물들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지만 인간은 아니다. 태어나는 것이야 자기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수동적인 것이라 해도 죽음만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오는 한 사람의 마지막은 세계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때도 있다.

아무리 강한 심장을 가졌더라도 죽음 앞에선 강해질 수가 없다. 죽음이란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 해도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심정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당해보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 자신이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는 시한부 인생이라면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지난 11월1일 29세의 신혼녀 브리트니 메이나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뇌종양을 앓던 그는 고통보다 죽음을 맞이했다. 존엄사(尊嚴死)다. 존엄사 인정확대를 주장하는 ‘연민과 선택’의 대변인은 “메이나드가 의사가 처방해준 약물을 복용하고 침대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 안겨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2012년에 결혼한 그는 뇌종양 말기 진단을 받고 6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그는 발작과 심각한 통증으로 고통을 받다 한 달 여 간의 조사 끝에 자신과 가족은 가슴 찢어지는 결정을 내렸다며 자신을 살릴 치료제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남아 있는 시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며 죽음을 택했다.

메이나드의 동영상을 보니 그는 자신이 고통 속에서 죽는 것 보다는 ‘평화롭게 가길 바란다(pass peacefully)’고 했다. 평화로운 죽음. 약을 먹으며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는 그길. 점점 의식이 희박해지는 본인이야 그렇겠지만 그를 보는 가족들까지 평화스런 마음으로 그를 보냈을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함께 했으리라.
존엄사(death with dignity)와 안락사는 다르다.

안락사(安樂死)는 의료진이 환자와 가족의 동의 아래 약물을 주입해 생을 마감케 하나, 존엄사는 의료진의 진료를 받은 환자가 처방해 준 약물을 스스로 먹거나 주입하여 죽음을 택한다. 메이나드의 경우엔 자신이 직접 의사의 처방약을 복용하여 스스로 세상을 떠난 케이스다.
20여년전 신학교에서 존 캅(John B. Cobb)교수의 과목을 들던 중 죽을 권리(Right to Die)에 관한 강의를 들은 것이 생각난다. 기독교적 교리로 볼 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의에 의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존엄사든 안락사든 살인에 해당된다. 하지만 사회법은 존엄사를 살인으로 인정하거나 혹은 인정 안하기도 한다.

미국엔 죽을 권리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주가 있다. 오리건, 버몬트, 몬타나, 워싱턴, 뉴멕시코다. 메이나드는 죽을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치 않는 캘리포니아에 살았다. 그러나 죽기 위해 가족들이 오리건에 이사까지 하여 법적인 보호 속에서 죽을 권리를 자연스레 실행에 옮겼다. 살아야 될 권리와 죽을 권리, 무엇이 다를까.

1942년 1월8일생인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은 살아야 할 권리를 가장 잘 알려준 사람 중 하나다. 그는 21세 때 루게릭(근위축성측색경화증)병에 걸려 온 몸이 굳어져 있어 식물인간과도 같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이뤄낸 업적인 우주론과 양자중력의 법칙과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는 세계를 놀라게 한다.

그는 지금 살아있는 전설이 돼 있고 2009년 미국대통령이 주는 자유훈장까지 받았다. 산자는 살아야 한다. 인간의 살아야 할 권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생명에 대한 의무다. 그러나 죽음보다 강한 고통이 엄습할 때엔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향하여 어서 오라고 울부짖게 된다. 인간의 양면성이 여기에 있다.

생(生)은 언젠가는 한 번 죽는다. 두 번 죽지는 않는다. 정한 날짜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메이나드. 당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그 상황,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어쩌면 숨결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스티븐 호킹처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닐까. 죽음, 난제(難題)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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