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저항의 글쓰기

2014-10-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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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수필가>

초록이 무성했던 잎들이 노랗게 변해가는 걸 보니 마음이 쓸쓸하다고 해야 하나, 고요하다고 해야 하나. ‘노벨문학상에 프랑스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란 큰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안타까운 마음에 계절 탓을 해본다. “기억의 예술로 인간의 운명·나치점령기 생활세계 묘사”란 소제목에서 그가 쓴 책의 내용이 저항적 일거라는 짐작이 된다.

한나라의 문화경제예술의 집약이 문학이고, 노벨문학상은 그 분야에서 세계최고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개인의 영광과 국가의 위상에 공헌하는 가치가 크다.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후보로 계속 거론됐으나 올해도 상이 비켜갔다.


아쉽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지금까지 110명의 작가에게 수상됐다. 아시아권에서는 인도의 타고르, 이스라엘의 요세프 아그논,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 중국의 모옌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류를 거부하거나 국가의 억압이나 사회의 위협을 견디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차별, 금기, 망각 등에 맞서 투쟁하고 실천해서 문학이 역사와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창조적 반항, 금지된 것에 대한 반항’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골 적 도전’의식의 저항 작가들이었다.

우리의 저항 시인 김지하는 ‘오적(五賊)’이란 시로 박 정권의 부정부패를 고발, 옥살이를 했고, 소설가 황석영도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6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소설가 조정래도 ‘태백산맥’으로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았으나 빨갱이로 몰려 어려움을 겪었다. 이 세 사람이 노벨상에 근접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니 희망은 있다.

노벨 문학상은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한다. 20여년 정도의 작가행보에 대해서도 철저히 조사한다니 ‘저항 작가’란 이름을 소중히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노벨문학상은 받지 못했지만 인류에 공헌했던 저항 작품들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읽힌다. 미국의 독립에 도화선이 된 페인의 ‘시사적인 상식’이라는 책, 흑인들의 해방을 불러온 헤리엇 비처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인류사회의 전체주의를 경고하는 뜻으로 쓴 조지 오웰의 ‘1984’이란 작품, 그는 “나는 왜 글을 쓰나”에서 “예술작품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짓을 공개하기 위해 쓴다.”고 했다. 나는 체제 비판을 암시적으로 쓴 그의 소설, ‘동물농장’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오랜 독재시대를 지낸 “한국의 작가들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느냐? 역사적이며, 시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표현할 사명감이 상실된 사상의 빈곤, 사랑이니 서정이니 하며 탐미주의만을 부추겨 써온 한국문학의 정체성, 마른자리만 찾아다니는 작가들의 허약한 체질 때문이 아니냐?”한다.

문학다운 문학을 해보지 못한 나지만 그 말에 깊은 반성을 했다. 고국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 그런 나로부터 자유롭고자 몸부림쳤던 세월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썼던 것이 아니었을까. 타국에 사는 많은 해외작가들의 글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나 싶다. 그렇더라도 저항 작품을 쓴 멋진 작가님들에게 박수는 보내고 싶다. 번역, 국력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부디 노벨문학상 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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