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Mr. Singer선생님

2014-10-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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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주(음대 명예교수)

아득한 어린 시절, 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일 년간 미국 가정에 체류하며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을 이수한 적이 있다. 옥수수 밭이 그림같이 펼쳐진 펜실베이니아 주의 소박한 마을, 영화 ‘Witness’ 의 배경이 되었던 Amish town 에 인접한 조용한 마을에 있던 작은 고등학교…….

어찌 보면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수준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돌이켜 보니 학생이 배워야 할 진짜 중요한 것은 다 가르쳤던 그런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의 일 년이 내게 있어 큰 충격과 도전, 그리고 깨우침의 시간 이었다면, 검소함과 근면함이 몸에 밴 한 평화스러운 목사님 가정에서의 경험은 내게 덤으로 주어진 행운이었다.


바로 그 고등학교에 미스터 싱어(Mr. Singer) 라는 이름의 역사 과목 담당 교생 선생님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름이 Singer이니 노래를 잘할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그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음치로 소문난 이 젊은 선생님, Mr. Singer! 당시 한국에서 고2 과정 이수 도중 미국 학교로 온 탓에 나는 미국역사 고3 과정의 진도를 따라가느라 쩔쩔맸고, 그런 나를 위해 Mr. Singer는 친절하게도 방과 후 과외 지도를 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교실에서 ‘나 홀로 시험’ 을 보게 되었다.

시험지를 건넨 Mr. Singer 가 말했다. 시험시간은 50분이라고.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내 책상 위에 시험과 관련된 교과서와 노트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도. 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한국에서 시험감독 선생님들이 책상 사이를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던 다소 살벌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던 나였으니까. 답안이 알쏭달쏭 해질라 치면 자꾸만 바로 옆에 있는 노트로 눈길이 갔다. 그 방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나 홀로 시험 방’ 이 아니었던가!

아, 그러나 이건 웬 조화일지? 답이 적힌 노트들과 나를 홀로 두고 조용히 방을 나간 그 Mr. Singer의 뒷모습이야말로 세상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시험 감독이었던 것. 정말 의외였다. 딱 두 번만 노트를 훔쳐보면 그 어려운 미국역사 과목 A는 문제없을 것이고 잘하면 미국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우등상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신나는 상상도 해 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도무지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말 없는 Mr. Singer의 그 뒷모습 때문에.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시험문제 몇 개를 틀렸던 사실이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이 경험담을 나는 종종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토론의 제목으로 삼는다.

정직함, 이것이 바로 미국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 힘일 것이다. 물론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도 여러 면에서 정말 많이 달라졌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런 저런 문제가 많다는 점에서는 미국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는 여전히 정직함에 대한 가치관의 뿌리가 깊게 내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뢰를 통해 오히려 더 큰 가르침을 주는 학교가 있고, 아이의 작은 눈속임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미국 가정의 전통적인 가정교육이 있다. 내가 그 일 년간 함께 했던 미국 목사님 댁의 여덟 살 난 딸아이는 어느 날 엄마 몰래 캔디를 슬쩍 먹고 나서 시치미를 뗐다.

거짓말을 한 벌로 그 날 밤 아이는 저녁을 굶은 채로 자야만 했다. 평소에는 아이에게 그렇게 따뜻한 부모가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귀한 자식 저녁을 굶기다니?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본 많은 미국인들의 철저한 가정교육의 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직한 삶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이 가정교육에서 학교 교육 현장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통해 나는 미국 사회에서 여전히 건강함과 희망을 본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그토록 지독한 거짓말과 속임수를 밥 먹듯 하며 살게 됐을까? 좀 달라질 방법은 없을까? 하긴 누구든 남 탓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요란한 캠페인을 벌일 일은 더 더욱 아니다. 그 옛날 Mr. Singer가 무언 중 내게 깨우쳐 준 것처럼 그저 작은 일상의 일에서 정직하게 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일로부터…….

나는 오래 전부터 Mr. Singer를 닮은 선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내 전공이 성악인 덕에 명실 공히 Miss Singer이니까 나름대로 그분과 공통점이 있긴 하다. 그래도 Mr. Singer 의 목소리만은 닮지 말아야겠다. 그 분은 당시 소문난 음치 이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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